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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공소

28.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창촌공소

by 세포네 2023. 7. 31.

1866년 병인박해 피해 숨어든 신자들 교우촌 형성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창촌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설립된 매남이공소와 되창말공소가 합쳐져 1957년 설립된 공소이다.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창촌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횡성군 서원면 창촌리 일대에 숨어들면서 형성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창촌(倉村)은 조선 시대 때 촌락의 환곡을 저장해 두던 곳집, 곧 사창(倉)이 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촌공소의 뿌리는 서원면 면 소재지 북쪽 매남이 마을에 있던 ‘매남이공소’다. 매남이는 전설의 용마(龍馬)가 나와 이 마을로 넘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 이곳에 큰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창촌 남쪽 창바우 마을에 한 장사(壯士)가 살았는데, 그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고 한다. 이후 이 웅덩이에서 용마가 나와 3일 동안 장사를 찾으며 울다가 유현리 느루개로 넘어가는 긴 고개인 질재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 마을을 ‘매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창촌공소 제대.

송순철 회장 3형제, 매남이에 처음 정착

창촌 매남이에 처음으로 정착한 교우는 송순철(베드로) 회장의 삼 형제다. 이들 형제의 할아버지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용인에서 원주 숯가마골(원주 부론면 법천리)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이후 박해가 잠잠해지자 삼 형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기 위해 이곳 매남이로 이주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 교회는 100년 가까운 조선 왕조 치하의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상복을 벗고 사제복을 입은 채 자유롭게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인 교우들에 대한 박해는 이어졌다. 실질적인 신앙의 자유는 이보다 훨씬 후인 1895년에 이뤄진다. 고종 임금이 1895년 1월 병인박해 순교자 남종삼(요한)과 홍봉주(토마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고,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를 만나 박해에 대한 유감을 뜻을 전하고 친선을 제의했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1895년을 공적으로 박해가 끝난 해라고 기록했다.

조선 왕조 치하의 박해가 공적으로 끝난 이듬해 조선 교회는 큰 경사를 치른다. 1896년 4월 26일 뮈텔 주교가 서울 약현성당(현 중림동약현)에서 강도영(마르코)ㆍ정규하(아우구스티노)ㆍ강성삼(라우렌시오) 부제의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 이날 서품식은 조선 땅, 곧 한반도에서 거행된 첫 번째 사제 서품식이었다. 이날 사제품을 받은 세 사제는 1849년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 이후 47년 만에 탄생한 한국인 사제들이다.

2011년 새 단장을 한 창촌공소는 인조석 바닥과 흰색 벽으로 깔끔하게 단장해 놓았다

착하고 순박하지만 대단히 비참한 생활

정규하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직후 제2대 풍수원본당 주임으로 임명돼 1943년 선종할 때까지 47년간 오직 풍수원에서만 사목했다. 정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은 “원주 풍수원, 오상골(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횡성 도새울(횡성군 공근면 도곡리), 창봉(횡성군 공근면 창봉리), 황달모로(횡성군 둔내면 현천리), 마라미(횡성군 서원면 창촌리), 강릉 서내(평창군 봉평면 유포리 서천), 고인돌(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상교터(평창군 방림면 계촌리), 평창 하일, 물푸레(평창군 평창읍 하일리 수청), 산너미(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산유), 그리고 영월 주실(영월군 김삿갓면 주문리)”였다.(정규하 신부가 1896년 8월 18일 뮈텔 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이 편지에서 ‘마라미’라고 표기된 곳이 바로 횡성군 서원면 창촌1리 ‘매남이’ 마을이다.

풍수원본당의 여느 교우들처럼 매남이공소 교우들도 “착하고 순박하지만, 대단히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들은 신부의 사목 방문 때에 제대로 보필하기가 거의 힘들고, 공납전(공소전-공소 신자들이 후원의 형태로 바친 일정한 금액의 봉헌금으로 교구 소유의 돈을 말한다)도 낼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산너미, 마라미(매남이), 황달미공소들이 그러했다.”(정규하 신부 1897년 2월 7일 자 편지에서)

정규하 신부는 1902년 3월 공소 순방에 나섰다가 매남이공소에 와서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을 했다. “병중에 9일 동안 성사를 주었고 그 때문에 아직도 기력이 회복되지 못해 조금만 바람을 쏘여도 즉시 복통과 두통이 옵니다. 중병은 아니라도 성무 보기가 어렵고, 입맛이 매우 써서 음식을 잘 먹을 수가 없습니다.”(정규하 신부가 1902년 4월 22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체 신심이 깊은 풍수원본당의 전통을 이어 공소 제단에 성체를 모신 감실을 두고 있다

매남이와 되창말공소 합쳐 창촌공소 설립

원주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발간한 「공소에 가볼까?」에는 “1907년 무렵부터 송순철 회장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하기 시작했다”고 소개되고 있는데 정규하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매남이공소는 1896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57년 매남이공소와 인근 되창말공소가 합쳐져 창촌 면 소재지에 공소 건물이 새로 건립되면서 ‘창촌공소’가 설립됐다. 되창말은 창촌2리 1반에 속하는 마을로 사창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 이후 춘천과 원주교구에서 파견한 전교 회장들이 창촌공소에서 활동하면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서원로149번길 6에 자리한 지금의 창촌공소는 1993년 새로 건축한 것이고, 공소 건물을 2011년에 개축했다.

창촌공소는 서원면 우체국 맞은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공소 정문 위에는 예수성심상이, 마당에는 성모상이 순례자들을 맞고 하고 있다. 공소 바닥은 인조석이고, 벽은 흰색 모르타르에 수성 도장을 해 놓았다. 그리고 양측 벽 하단과 보, 창틀은 나무로 장식돼 있다. 제단 중앙 십자가 양편에는 부활하신 예수상과 성모상이 장식돼 있다. 또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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