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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100선

[25] 쇼팽 / 즉흥곡 제4번 C# 단조, Op.66 '즉흥 환상곡'

by 세포네 2023. 7. 27.


     Fantaisie-Impromptu in C# minor Op.66
         쇼팽 환상 즉흥곡 C Sharp Minor Op.66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



즉흥곡이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악곡을 진행하는 형태를 말한다. 쇼팽이 쓴 즉흥곡은 4곡이 있으며 <제1번, 4번>이 유명하다. 특히 제 4번 환상 즉흥곡은 1834년의 작품으로 ‘환상’이란 제목은 그가 죽은 후 붙여졌다.그는 생전에 이 곡을 무척 아꼈으며 죽은 후에 파기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4곡의 즉흥곡 중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화려한 기교, 감미로운 선율이 매혹적이다.
작품 28의 프렐류드와는 달리 네개의 즉흥곡들은 세트로 출판이 되지 않았다. 가장 처음 작곡이 되었던 것은 흔히 환상즉흥곡이라고 불리는 곡으로 25살이던 1835년에 작곡이 되었지만 죽은 후에야 출판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작품번호는 가장 늦은 66번으로 되어 있다. C sharp minor의 이 곡은 네 Impromptus중 가장 첫눈에 반하게 되는 곡으로 turbulent한 처음과 끝부분이 가운데의 쇼팽음악중 가장 서정적이고 우아한 멜로디의 가운데 부분을 앞뒤로 감싸는 3부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두 부분의 강렬한 대비는 쇼팽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 발라드 2번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쇼팽이 왜 이 C sharp minor Impromptu의 출판을 미뤘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의견이 있다. 일부 쇼팽학자들은 빠르고 격정적인 처음과 끝부분이 Ignaz Moscheles의 E flat Impromptu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쇼팽 자신은 이 곡을 그리 자랑스러워하지 않았고 감추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 3. 1 - 1849. 10. 17
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북쪽 나라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연초 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그는 공장이 폐쇄된 후 스카르벡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 교사로 머물렀다. 그리고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둘째가 쇼 팽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이때 슈만으로부터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극찬을 받음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그러나 쇼팽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남몰래 사모하면서도 도저히 사랑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들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공동 생활을 즐겼는데, 이곳에서 쇼팽의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쇼팽이 언제까지나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는 없었나 보다. 그들의 공동 생활은 1846년 그의 나이 36세 때 끝이 났다.그후 그는 생계를 위해 한때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털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가 기후가 몹시 나쁜 그곳에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피에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모국 폴란드의 바르샤바 성십자 교회에 안치되었다.쇼팽은 일생을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만든 6개의 관현악곡, 3개의 소나타 역시 빛을 발하고 있고,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폴로네이즈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다. 새로움이 가득한 그의 곡들을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정교함과 치밀한 악상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쇼팽은 선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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