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선종, 1일 명동대성당에서 장례 미사 봉헌

by 세포네 2021. 5. 2.
728x90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남기고… “늘 행복하세요”

 

▲ 현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었던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4월 27일 밤 10시 15분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고 향년 90세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4월 27일 밤 10시 15분 선종한 뒤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 대성당에서 거행된 안치식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분향을 하고 있다. 백영민 기자


한국 교회의 큰 별이 졌다.

현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었던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4월 27일 밤 10시 15분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향년 90세. 그 시각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는 추기경 선종을 알리는 조종(弔鐘)이 울려 퍼졌다.

늘 온화한 모습으로 하느님 진리를 전한 한국 교회의 ‘영적 아버지’였던 정 추기경은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한국 교회 두 번째 추기경인 정 추기경은 서울과 청주교구장으로서 교구장 직무만 42년을 지냈으며, 교회법 학자요, 평생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복음 말씀을 저서로 펴낸 ‘주님의 작가’로 신앙을 수호하는 데 끝까지 힘썼다.

지난 2월 21일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한 정 추기경은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도 3월 초 기력을 회복했으나, 다시 상태가 악화해 4월 27일 밤 선종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단과 사제, 수도자, 의료진이 정 추기경의 마지막 임종을 지켰다.

2006년 정 추기경은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밝힌 뜻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적출이 이뤄졌으며, 추기경의 각막은 고인의 뜻에 따라 사용할 예정이다. 또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무료급식소 명동밥집과 청주교구 꽃동네, 교구 성소국(동성고 예비신학생반), 청소년국 아동 신앙교육, 장학재단 등 5곳을 위해 1억 1000만 원을 기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와 사회를 위했다. 생전 “국민들을 위한 밤하늘의 작은 별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대로 정 추기경은 그의 주교 사목 표어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됐다.

1931년 12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난 정 추기경은 1961년 3월 사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됐다. 서울대 공학도였던 정 추기경은 본래 꿈이었던 발명가 대신, 모든 이에게 참 행복을 주는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

서울 중림동약현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성신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1968년 교황청 우르바노대학교에서 교회법을 전공했다. 이어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상서국장 등을 거쳐 1970년 39세에 주교로 서품돼 청주교구장에 임명됐다. 이후 28년 동안 청주교구를 이끈 정 추기경은 1998년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해 14년 동안 교구를 이끌었으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2006년 한국 교회 두 번째 추기경에 서임된 정 추기경은 2012년 교구장 사임 때까지 생명 나눔 운동과 북한 선교, 신자 영적 성장에 힘을 기울이며, 다변화하는 현대를 관통하는 한국 교회를 크게 성숙, 발전시켰다.

평생 교회를 위한 막중한 책무를 맡아온 정 추기경은 사제품을 받은 이후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신앙 서적을 집필해 출간해왔다. 그가 펴낸 저서와 번역서만 65권에 이른다. 지난해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아 펴낸 「교회법 해설」 개정판 출간을 끝으로 정 추기경의 왕성했던 집필 활동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염수정 추기경은 정 추기경 선종 2시간 뒤인 4월 28일 0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주례한 선종 미사에서 “교구 사제단에게 김수환 추기경님이 아버지였다면, 정 추기경님은 어머니와 같이 따뜻하고 배려심 많고, 우리를 품어주시고 교회를 위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항상 신자들에게 큰 사목자로, 사회의 어른으로 교회에 큰 발걸음을 남기시며 주님의 자녀로 성실하게 신앙생활하시다 주님 품에 안긴 추기경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길 기도드린다”고 추모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도 추도사를 내고 “삶의 마지막까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자 희생을 실천하신 우리 교회의 큰 어른이신 정 추기경님을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속에 주님께 보내 드린다”며 “일생 한국 천주교회에 베풀어 주신 큰 사랑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마련된 빈소에는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장례 미사는 1일 오전 10시 거행되며, 고인은 용인 천주교 성직자묘역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고인의 추모 미사는 3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염수정 추기경 주례)과 오전 11시 용인 성직자묘역(손희송 주교 주례)에서 각각 봉헌된다.

 

▲ 정진석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단이 고인을 위한 추모 기도를 바치고 있다.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4월 27일 밤 10시 15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서 선종한 고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선종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각층의 추모 및 애도 물결이 이어졌다. 서울대교구는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 공식적인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장례는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5일장으로 거행됐다.


▲ 4월 27일 밤 10시 15분, 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선종하자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조종이 울려 퍼지고 있다.

 

▲ 정진석 추기경의 빈소를 찾은 신자들이 조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정진석 추기경의 빈소에서 수도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명동대성당 유리관에 안치

밤 11시 31분, 고인은 서울성모병원 지하 2층 주차장에 대기하던 구급차에 실려 곧장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4월 27일 저녁 11시 58분. 안구적출을 마친 정 추기경을 태운 구급차가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당도하자 조종(弔鐘)이 울려 퍼졌다. 추적추적 내리던 구슬 비가 이내 굵어져 어둠 속을 적셨다.

염수정 추기경과 교구 주교단과 사제단, 수도자와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인의 유해가 유리관에 안치됐다. 성전 안에는 추기경의 주교 사목 표어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문장이 내걸렸다. 염 추기경이 안치식을 주례하고, 고인을 위한 추모 기도를 바쳤다. 참석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함께 기원했다.

염 추기경은 이어 거행된 선종 미사 강론에서 “추기경님은 태어나시자마자 며칠 만에 이곳 명동대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또 이 성당에서 복사를 서고, 첫 영성체와 견진성사, 신품성사를 받으셨다”며 “주교가 되신 뒤 청주교구에서 봉직하시다가 서울에 오셔서 교구장으로 사목하시다 오늘 주님 품에 안기셨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염 추기경은 “옆에서 뵀던 정 추기경님은 깊은 영성과 높은 학식과 부드럽고 고매한 인격을 소유하신 사제 중의 사제셨다”면서 “항상 겉으로는 엄격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탈하시면서도 겸손하신 모습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게 한다”고 전했다.

염 추기경은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항상 북한 형제들과도 화해와 일치를 희망하셨고,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조건 없이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상대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그 유지를 본받아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신 예수님 모습, 생명을 존중하고,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고 끌어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지키며 조문

4월 28일 오전 7시, 밤새 내린 봄비로 쌀쌀해진 날씨에 성직ㆍ수도자와 신자들의 조문이 시작됐다. 서울대교구 사제들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들, 교구청 직원들이 제일 먼저 빈소를 찾았다.

연도는 서울대교구 연령회연합회(회장 정창혁)의 지휘로, 매시간 정해진 지구별 봉사자들이 시간대별로 돌아가며 바쳤다. 인원은 매 연도 때마다 80명 이내로 제한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발열 체크와 손 소독을 한 조문객들은 거리 두기를 지키며 정숙한 분위기에서 조문을 이어갔다.

조문객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며 3명씩 조문했다. 유리관 안에서 묵주를 쥔 채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잠든 추기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짧은 묵념을 바쳤다. 성전에 들어올 때부터 흐느껴 우는 신자들,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싼 채 오열하는 신자도 있었다.

한편, 명동대성당 문화관 2층 꼬스트홀에서는 매시간 지구별로 돌아가면서 미사가 봉헌됐다. 28일 오전, 꼬스트홀에서 미사를 주례한 김성권(서울 녹번동본당 주임) 신부는 “(추기경님이) 199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신 후 처음으로 추기경님께 사제품을 받았다”며 “많은 성소자와 사제들이 나오길 바라셨고, 그만큼 신경을 많이 쓰셨다”고 회고했다.

이른 아침, 빈소를 찾은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 정치우(안드레아)씨는 “한국 천주교회에 큰 별이 졌다”면서 “평소에 교회를 걱정하시며,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셨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개인적으로는 아들에게 사제품을 주신 인연이 있고, 책 추천사도 써 주셨다”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쏟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신인선(아숨타)씨는 “추기경님이 살아 계실 때 7, 8번 개인적으로 찾아뵈었는데 항상 존대어로 쓰시고, 저를 성모님 대하듯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추기경님처럼 살고 싶어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서약했다”며 지갑에서 장기기증 등록증을 꺼내 보여줬다.

서울대교구는 굿뉴스에 추모 게시판을 열어 고인을 위한 추모의 장을 마련했다.

서울대교구, 선종 소식 공식 발표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홍보위원회 부위원장) 신부는 선종 이튿날인 28일 오전, 교구청 신관 1층 로비에서 공식적으로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전하고, 장례 일정을 공개했다.

허 신부는 취재진들에게 “정진석 추기경님은 염수정 추기경님과 주교님들, 사제들, 수녀님들과 주치의 김영균 교수님과 의료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면서 “항상 선교를 최우선의 사목목표로 삼고, 특별히 생명과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목을 펼치셨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2018년 9월 27일 연명 의료계획서에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서명했으며, 2006년에는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에 서약했다. 허 신부는 “정 추기경이 고령으로 장기 기증이 어렵다면 안구라도 연구용으로 사용해달라고 연명계획서에 친필로 부탁했다”고 회고했다.

허 신부는 “지난 3월 통장에 있는 잔액 모두를 명동밥집(1000만 원), 선교 장학회(5000만 원) 등에 기증했다”면서 “당신의 장례비를 남기겠다고 하셨는데 교구에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어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셨지만 당신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장학회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서 “어린이 선교에 도움이 되는 장학회(설립 준비)를 현재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 애도 메시지

정진석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합니다.

한국 천주교의 큰 언덕이며

나라의 어른이신 추기경님이 우리 곁을 떠나

하늘나라에 드셨습니다.

참으로 온화하고 인자한 어른이셨습니다.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주교로 서품되신 후,

한평생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평화를 주신 추기경님의 선종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추기경님은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란

사목표어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나눔과 상생’의

큰 가르침을 남겨주셨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돈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한 정책”이란 말씀은

국민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추기경님, 지상에서처럼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우리 국민과 함께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추기경님의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안식을 누리소서.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