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 화백의 김대건 신부 전신 초상에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라 소개
▲ ‘복자 김대건 신부’ 에카르트는 “루도비코 장이 그린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 용산 서울 신학교의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라고 소개했다. |
▲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liche Kunst)」 표지. 하단 박스 안에 덕원(한국) 베네딕도회원 안드레아 에카르트의 이름과 논문 제목(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이 있다. |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liche Kunst)」 1929년 3월호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가 소개되었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1904년~1937년 그리스도교 미술과 미술사를 주제로 독일 뮌헨에서 간행하던 잡지이다. 표지와 본문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잡지의 크기는 세로 29.5㎝ 가로 21㎝이다.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소개한 사람은 안드레아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4~1974)이다. 한국 이름 옥낙안(玉樂安)인 그는 한국의 문화 예술 분야에서 뚜렷한 공을 세운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는 1884년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났다. 1905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성 베네딕도회 회원으로 1909년에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첫해에 입국한 에카르트는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 수도원 내에 설립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물리학과 화학 교과서와 한국어 문법책을 저술했다. 1920년 성 베네딕도회가 원산대목구를 책임지게 되면서 원산본당과 팔도구본당에서 사목하기도 했다.
1925년에 서울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도서관 관리를 맡는 한편, 새로 한국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에게 극동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경성제국대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5개 국어 이상을 능통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27년 10월 백동수도원이 덕원으로 완전히 이전되자, 이듬해 7월 시베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1928년 독일로 돌아간 이듬해에 ‘한국 미술을 세계 미술로 본 최초의 저술’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선 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를 썼다. 이 책은 독일어와 영어로 동시에 출판되었다.
에카르트는 1931년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대학에서 「한국의 학교 제도(Das Schulwesen in Korea)」라는 주제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 교육학연구소 동양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 의하여 연구소가 폐쇄되자 바이에른으로 돌아가 뮌헨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쳤으며, 이 무렵 수도회를 탈회했다. 에카르트는 한국어와 한국 전래 동화, 한국 미술 등을 주제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독일에서 한국학을 출발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잡지에 실린 에카르트 논문의 제목은 「루도비코 장과 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이다. 그는 논문의 제목에서처럼 장발(루도비코)의 작품을 통해 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소개했는데, 이때 사용한 도판은 ‘김대건 신부 초상’,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 자매의 초상’, ‘14사도’ 등이다. 이와 함께 실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 드로잉은 1896년에 간행된 「조선과 프랑스의 선교사들(La Core et Les Missionnaires Franais)」과 1918년에 간행된 「가톨릭 선교지(Les Missions Catholiques)」에 실린 플러레(Fleuret)의 동판화와 유사한데, 1920년 용산 신학교장 기낭 신부의 은경축 기념 선물로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에카르트는 김대건 신부의 전신 초상화를 소개하면서 도판 하단에 “루도비코 장이 그린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 용산 서울 신학교의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라고 설명했다. 물론 김대건 신부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인 용산신학교와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관계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에카르트는 장발이 그린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14사도’와 14사도의 다양한 손의 형태를 직접 촬영하여 함께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화가였고, 장발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수 개월간 자신에게 유화를 배웠다”고 언급하며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14사도’를 그린 캔버스 앞에서 팔레트를 들고 앉아있는 장발과 자신의 초상화(사진 오른쪽 아래)를 함께 놓고 직접 찍은 사진도 실었다.
▲ 논문과 함께 소개된 도판들. 상단은 ‘14사도’ 손 스케치와 ‘김대건 신부의 초상’ 드로잉이고, 하단은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 자매의 초상’과 주교화 명동대성당의 ‘14사도’이다. |
▲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장발 화백과 에카르트(오른쪽 아래) 초상화. |
송란희 (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자료 소장 :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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