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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김대건신부 200주년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5) 김대건 서품받다

by 세포네 2021. 3. 10.

조선에 복음 뿌리내리고 교회 자립할 수 있는 토대 마련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방인사제 양성이 첫째 목표
현지 교계제도 정착시키고 복음의 토착화 위한 방안
유학 생활 난관 극복하고 첫 방인사제 된 김대건 신부 조선 입국로 개척에도 기여

 

은이성지에 있는 2016년 봉헌된 성당.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진쟈샹성당을 복원했다.
오른쪽으로 김대건 기념관이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부를 때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邦人)사제다. 방인사제는 그 나라 출신의, 그 나라의 사제를 의미한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은 ‘김대건’이라는 개인의 사제서품 그 이상으로 방인사제 서품이라는 의미가 부각된다. 방인사제로서 김대건의 서품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방인사제를 염원한 선교사들

“…이 모든 것이 방인사제를 더욱 필요하게 만듭니다. 신부님, 저는 방인사제 양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싶습니다. 조선교회는 곧 방인사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김대건의 서품식을 주례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4년 5월 18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선교의 어려움을 전하면서 김대건이 사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페레올 주교는 편지에 추신으로 교황청에 나이제한에 관한 관면을 받아서라도 김대건을 하루라도 더 빨리 사제로 만들고 싶은 심정을 전했다. 당시 김대건은 만 23세로, 사제서품 조건인 만 24세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희망. 사제 김대건의 탄생은 조선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도 그랬지만, 선교사들에게도 간절한 염원이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스승이기도 했던 매스트르 신부도 1844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방인사제 한 명을 만들고자 한다”면서 “그들(조선인 신학생들)은 천주께서 도와 주신다면 조선교회의 기둥들이 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방인사제는 단순히 조선인이 서품을 받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방인사제 탄생은 선교사들의 목적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장에는 선교사들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우선순위를 정했는데, 첫째가 현지인 중 적합한 사람을 선발해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것이고, 둘째가 새 신자들을 돌보는 것, 셋째가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회칙은 이 우선순위에 “둘째보다는 첫째가, 셋째보다는 둘째가 더 중요하다”면서 “우선순위를 절대로 뒤바꾸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은이성당 제대 오른편에 있는 김대건 성인 유해함.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방인사제 탄생의 의미, 조선교회의 자립

김대건·최양업은 파리외방전교회를 통해 사제품을 받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 아니었고 온전히 조선교회만의 사제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원칙적으로 자신들이 양성한 방인사제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방인사제 양성의 목적 자체가 현지 교회의 교계제도 구축과 자립에 있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방인사제 양성을 가장 중요시한 이유는 이를 통해 조선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로 창립됐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는 주로 수도회들이 담당했는데, 대체로 현지에 수도회 본원의 지부를 세우는 형태로 이뤄졌다. 본원에서 내려오는 정통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한 선교사 파견과 지원에는 유리할 수 있었지만, 복음의 토착화나 현지 교계제도 정착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교황청은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하고 선교 활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앞장선 단체가 파리외방전교회였다.

방인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향후 교회의 선교 방향이기도 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1년 회칙 「가톨릭 선교의 증진에 관해」를 통해 선교가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새로운 민족에게 전하고 신앙을 촉진시키며 토착 교회를 설립하는 것, 즉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해 그들로 이뤄진 교계제도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선교 교령」을 통해 “실제로 여러 신자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 가운데에서 주교, 신부, 부제의 품계에서 자기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구원의 고유한 교역자를 가질 때에 교회는 어떠한 인간 사회에서든 더욱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며 방인사제 육성의 중요성을 말했다. 한국교회의 자립은 김대건·최양업 신부 탄생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임경명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목적은 철저하게 그 나라에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 있다”며 “김대건·최양업 신부님을 양성한 것도, 배론에 신학교를 세운 것도 이 땅의 신부들이 이 교회를 위해 활동할 수 있도록, 그를 통해 한국교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 것”라고 설명했다. 또 “지역교회 발전에는 교구 사제의 역할이 크다”며 “오늘날 한국은 교구 사제들이 많고, 크게 발전했다”라고 덧붙였다.

■ 마침내 첫 방인사제

방인사제 양성을 위한 여러 도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소자의 응답이 없었다면, 박해시기 첫 방인사제 탄생은 불가능했거나 더 나중의 일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대건의 응답은 그를 양성한 선교사들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자주성과 경솔성에도 불구하고 헌신의 확실한 표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강남(중국)으로 그의 주교를 영입하러 오기 위해 미지의 항해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조선 포교에 큰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매스트르 신부가 1846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글을 살피면 이런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김대건은 유학생활 내내 최양업·최방제보다 학업에 뒤처졌고, 그의 스승들은 김대건의 건강적·성격적인 면을 들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을지를 염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해 서울에 선교거점이 될 집을 마련해 놨을 뿐 아니라, 배를 마련해 중국을 향하는 항해로까지 개척해 냈다. 도처에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중에 어느 선교사도 해내지 못한 일을 김대건이 해냈던 것이다.

특히 이런 성공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대건은 사전에 지리·항해 지식을 총동원해 올바른 항로를 설정했고, 조선 입국 후 배를 통한 입국에 따르는 어려움도 사전에 파악했다. 이 일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의 역할을 크게 높이 샀고,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과 함께 뱃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할 수 있었다.

김수태(안드레아)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 개척」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은 프랑스 배나 중국 배가 아니라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그와 조선인 신자가 마련한 조선 배에 의해서 이뤄졌다”면서 “이것은 프랑스 선교사들로 하여금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어떤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했다”고 말했다.

■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은이성지 성당(진쟈샹성당)

은이성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성당은 김대건의 사제서품식 장소인 중국 상하이 진쟈상(金家巷)성당을 복원한 것이다. 상하이 도시계획으로 헐리는 진쟈샹성당을 실측해 도면을 만들고, 성당 해체 시 자재도 일부 사용해 진쟈샹성당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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