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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김대건 신부가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봉헌한 장소

by 세포네 2020. 12. 23.

사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돌우물골’에서 봉헌한 성탄 미사

 

▲ 남별궁터에 지어진 환구단과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집 터에 지어진 조선호텔.

 

▲ 20세기 초반 조선호텔과 환구단 모습을 보여준다. 남별궁 뒤편 돌우물을 지나 두 번째 초가가 김대건
신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제로서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에 맞는 주님 성탄 대축일이다. 희년을 맞아 김대건 성인이 사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곳이 어디인지 자못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이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여러 기록과 증언을 통해 그 장소를 짐작할 순 있다. 김대건 신부의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봉헌 장소를 찾아 175년 전 1845년 12월 조선으로 떠나보자.

성탄절 미사 기록은 왜 없나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경기도 은이교우촌에서 어머니 고우르술라와 신자들과 함께 봉헌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1845년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에 관해선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조선 교회 성직자들의 사목 일정과 연관이 깊을 듯하다. 조선의 선교사들은 통상 1년에 2회 성사 여행을 다니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사목방문했다. 이 성사 여행은 매년 9월초에 시작해 주님 성탄 대축일이 있기 전까지 이어졌다. 주님 성탄 대축일에는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지낸 후 다시 성사 여행을 재개해 이듬해 4월 주님 부활 대축일 전까지 끝냈다. 8개월 가량 계속된 성사 여행이 끝나면 5월부터 장마와 더위가 끝나는 8월까지 4개월 정도 쉬면서 우리말 기도서와 전례서를 편찬하고,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낼 각종 보고서를 작성했다.

조선 선교사들의 이러한 사목 일정을 감안했을 때 주님 성탄 대축일에는 주로 성직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회장과 복사, 식복사 등과 함께 미사를 하고 축일을 지내 특별히 보고할 것이 없었기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겨울 어디에 있었나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조선 신자 11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강경 황산포 인근에 도착했다. 다블뤼 신부는 다음날 신자의 안내로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부여 공동 교우촌으로 떠났고,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조선인 신자들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반면 페레올 주교는 안전한 겨울이 올 때까지 강경에 머물기로 했다. 김 신부는 강경 교우 집에서 페레올 주교를 돌보다 11월 강경을 떠나 자신과 페레올 주교의 거주지를 정리한 후 성탄이 다가오기 전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김 신부는 1845년 성탄절에 페레올 주교와 한양에 있었다.

왜 하필 한양인가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왜 한양으로 왔을까?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9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그 이유가 드러난다. “교우들이 이 나라의 수도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당시 교우들은 한양이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시기 가장 안전한 장소로 여겼다. 또 한양은 조선 교회가 창설된 곳이며 조선 교회의 중심지였다.

김대건 신부는 부제품을 받은 직후 조선에 입국해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했고, 얼마간 신자 집에 머물다가 현석문(가롤로)의 주선으로 ‘돌우물골’(석정동)에 페레올 주교와 선교사들이 거주할 집을 마련했다. 그는 1845년 4월 30일 상해로 떠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는 돌우물골 집에서 14살 소년 둘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가르쳤고, 선교사들을 위한 「조선전도」를 그렸다. 또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라틴어로 작성했다.

돌우물골

병오년(1846년) 「일성록」과 포도청 문초 기록 등을 보면 김대건 신부는 한양 돌우물골에서 살았다. 그가 부제 때 페레올 주교의 거처로 마련한 바로 그 집이다. 김 신부는 가난하고 의탁할 곳 없던 자신의 복사인 이의창(베난시오)에게 그 집에 살면서 관리하도록 했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 집은 페레올 주교의 거처로 마련했기 때문에 김대건 신부뿐 아니라 페레올 주교가 함께 살았을 정황이 크다. 곧 돌우물골 이의창의 집은 조선대목구청이자 페레올 주교의 주교관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제관이었다. 다음의 정황이 그 단서이다.

첫째, 김대건 신부의 진술로는 이 집에 이의창뿐 아니라 현석문과 이재의(토마스)가 항상 머물렀다. 현석문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기 전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책임과 목자가 없는 동안 조선 교회를 보살피는 책임을 맡았다. 오늘날 한국평협 회장직을 맡은 교회 최고 평신도 지도자였다. 앵베르 주교의 복사였던 이재의는 그 경험으로 페레올 주교를 곁에서 도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선주 임성룡은 이 집에서 백동 이가, 남대문에 사는 남경문(세바스티아노), 서강의 심사민, 덕산 사람 김순여 등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돌우물골 집에 서울과 지방의 지도자급 신자들이 모여든 것을 보면 페레올 주교가 거처했을 정황이 높다.

둘째, 돌우물골 이의창 집에는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우술임(수산나), 정철염(가타리나), 오바르바라 등 다섯 명의 여교우들이 상주했다. 김 신부 혼자 이 집에 살았다면 이렇게 많은 여교우들이 상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페레올 주교가 함께 거주했기에 그를 수발할 식복사와 여교우들과 연락을 취할 다수의 여성 신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셋째, 집에 전례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는 점이다. 임성룡은 “김대건 신부가 불러 내실에 들어가니 벽면에 4~5개 인물 족자가 걸려 있는데 모두 당화(중국 그림)였고, 기묘한 모양을 한 이상한 돌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성인화와 성상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넷째, 한양 생활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페레올 주교는 1845년 12월 27일자 편지에서 “서울에 사는 신자들은 대부분 신자가 아닌 친척이나 친구들과 섞여서 살기 때문에 사제는 그들이 사는 집에 출입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다섯째, 김대건 신부의 존재를 알고 있던 신자들은 모두 이의창의 집을 “신부댁”이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돌우물골 김대건 신부 집은 어디에

김대건 신부뿐 아니라 함께 체포된 이들은 모두 김 신부의 거처를 “소공동 돌우물골(石井洞)”이라고 진술했다. 더욱이 임성룡은 김대건의 집 위치를 꼭 찍어 실토했다.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라고.

김 신부가 활동하던 1840년대에 김정호가 제작한 한성지도인 「수선전도」에도 남별궁 옆에 돌우물골이 표시돼 있다. 남별궁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의 시집가 살던 집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했다. 1593년 명나라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내고 이곳에 살면서 ‘남별궁’(南別宮)이라 불렀다. 고종은 1897년 이곳에 환구단을 짓고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했다.

소공동 남별궁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는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이다. 교회사학자 차기진(루카) 박사가 2005년 고증한 바 있다. 조선대목구청이자 페레올 주교의 주교관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제관이었던 이 집은 19세기 말까지 42년간 조선 교회의 재산으로 유지됐다. 뮈텔 신부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5년 1월부터 1886년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기해(1839년)ㆍ병오(1846년) 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재판을 이 집에서 열었다. 안타깝게도 유서 깊은 소공동 돌우물골 김대건 신부의 집은 1887년 종현(현 주교좌 명동대성당)성당 대지 매입 때 자금난으로 팔렸다.

김대건 신부의 첫 성탄 미사 장소는 현 조선호텔 자리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이다. 좀더 장소를 확대하면 소공동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주차장 일원까지 포함할 수 있다.

1845년 12월 25일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는 아마도 페레올 주교의 미사 복사를 서면서 현석문과 이의창, 이재의,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우술임(수산나), 정철염(가타리나), 오바르바라 등과 함께 감격스러운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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