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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남긴 정신

by 세포네 2020.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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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무효” 46년 만에 무죄… 하느님 정의 증거한 지학순 주교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지학순(1921~1993) 주교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9월 17일 46년 만에 열린 재심 선고 공판에서다. 지 주교는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체포됐다.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와 민주화 지지자들의 대대적 구명운동으로 1975년 석방됐다.
 

성 베네딕도회 김상진 신부는 최근 소장 자료를 정리하던 중 지 주교의 양심 선언과 관련한 여러 필사 자료들을 찾아내 본지에 알려 왔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과 이를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 그리고 보편 교회에 알린 사제단의 활동을 생생히 전해주는 자료들을 기초로 지학순 주교의 삶과 신앙, 신앙에 뿌리를 두고 불의에 맞섰던 그의 활동과 정신을 돌아본다.

양심선언으로 정면돌파
 

“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하게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첫째,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둘째,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최소한도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한 선언이 지학순 주교 입에서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여차하면 체포되고 까딱하면 사형선고가 날아들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지 주교는 1974년 7월 23일 중앙정보부의 소환장을 받은 뒤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옛 성모병원) 앞마당에서 양심선언문을 발표했다.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해 수도자와 신자, 국내외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유신헌법은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된다”면서 “이 외에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심선언을 한 지 주교는 성모 동굴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명동대성당으로 유유히 걸어가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서도 꼿꼿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미사를 마치고 나온 지 주교를 곧바로 연행해 갔다.
 

지 주교는 자신이 구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양심선언으로 정면돌파를 택했다. 자신과 같은 혐의로 잡혀가 옥고를 치르는 청년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지 주교에게 비상군법회의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지 주교는 양심선언 전 이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면맹) 사건에 개입됐다는 이유로 한 차례 강제 연행됐다. 당시 그는 해외에서 열리는 회의 참석차 대만과 필리핀을 방문하고 유럽을 들렀다가 귀국하던 길이었다. 1974년 7월 6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됐다. 마중 나온 사제들은 지 주교가 입국장에 나타나지 않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틀이 지나서야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지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감금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 주교에게 씌워진 혐의는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금지)와 4호(민청학련 관련 활동 금지) 위반이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내란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김지하에게 자금을 줬다는 이유였다.

 

민주화의 새벽을 연 성직자
 

지 주교의 양심선언과 구속은 한국 사회가 유신체제에 저항하게 된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 주교가 ‘민주의 새벽을 연 성직자’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 가톨릭교회의 민주화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지 주교의 구속으로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은 불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침묵하지 않았다. 명동대성당을 필두로 전국 성당에선 시국 미사와 기도회가 잇달아 열렸다. 그럼에도 지 주교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교구를 초월해 지 주교 석방을 외치던 사제들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을 결성해 어둠 속에 갇힌 인권과 민주주의를 밝히는 횃불이 되기를 자처했다.
 

지 주교의 신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던 윤공희(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는 지 주교 평전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에서 “지학순 주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열망을 교회 안에서 성취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세상의 불의 앞에서 교회는 무엇이라 답변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느님 정의를 증거했다”며 교회를 세상으로 나오게 한 지 주교의 역할이 그의 사명이었음을 강조했다.
 

지 주교는 교회와 사회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석방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투옥된 지 226일 만인 1975년 2월 17일 풀려났다.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나온 지 주교는 곧장 명동대성당으로 향했고,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체조배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교구장을 맞이하는 원주교구는 교구 전체가 들썩였다. 원주역에서 주교좌 원동성당까지 이르는 1.5km 거리의 길 양쪽에는 태극기를 손에 든 신자 5000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돌아온 지 주교를 환영했다. 석방 이후 그는 또다시 그가 걷던 민주화의 길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며 가장 가난하고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다녔다.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현
 

모두가 지 주교의 민주화 활동에 지지를 보낸 건 아니었다. 성직자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이들도 많았다. 굳이 왜 주교가 나서 교회와 사회를 분열시키느냐는 비난도 쇄도했다. 하지만 지 주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하느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그가 수감생활 중에 바오로 6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교황님, 저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주교로서, 하느님과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저는 인간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갇혀 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1974년 9월 서울 구치소에서 쓴 편지 중 일부)
 

그는 교회가 신심 활동과 미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돼 사회 전체에 도움을 주고,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보는 데 투신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는 그가 주교로 임명된 해에 참여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1962~1965) 정신이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과 단절된 교회가 아닌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상을 새롭게 제시했다.
 

지 주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체 회의에 참여했던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누구보다 지 주교의 행보를 깊이 이해했다. 김 추기경은 지 주교 장례 미사에서 “지 주교가 이같이 일어선 동기는 결코 정치적 취향 때문이 아니고 남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한 지 주교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의 삶과 신앙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소외된 이들 비추는 빛이 되다

 

 

심성이 여리고 정의감이 넘치던 소년
 

지학순은 1921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읍 청학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중화성당에서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심성이 착했던 소년은 동무들이 사과를 서리해서 손에 쥐여주면 본당 신부에게 달려가 고해성사를 보고 한바탕 꾸지람을 들어야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지학순은 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집안이 늦게 입교한 이유도 있지만, 부모는 아들이 혼자 살아야 하는 신부가 되는 것이 기껍지 않았다. 어렵사리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그는 폐결핵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병세가 호전되자 잠시 직장생활도 했다. 중화군청의 서기로 취직 후 두만강 국경지대 세관에서 근무하며 세상 물정에도 밝아졌다. 하지만 선한 품성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한번은 아기를 업고 밀수하는 부인을 잡았는데 사정을 듣고 보니 박복한 여인이었다.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부인에게 압수품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신학교에서 돌아와 취직까지 했기에 혼담도 오갔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본당 신부로부터 사제가 모자라 걱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지학순은 부모에게 사제의 길을 다시 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원산에서 가까운 덕원신학교로 진학했다.
 

성실한 지학순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의 정의감은 늘 참을성을 이기곤 했다. 때때로 윗반 학생들과 다투기도 했고, 신학교를 중도에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닥쳐왔다. 이때 교수 신부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던, 훗날 수원교구장이 된 김남수 신학생이 교장 신부를 말리고 나서 문제가 일단락됐다.
 

해방 후 북녘땅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며 신부들은 연행되고 신학교는 폐쇄됐다. 지학순은 평양교구 김필현 부주교에게 북한 교회의 실상을 서울에 알리라는 중책을 맡게 됐다. 지학순은 고향에 잠시 들러 어머니를 만나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는 “부디 몸조심하고 꼭 살아서 신부가 되어라”라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38선을 넘다 체포돼 모진 고초를 당했고, 고향에서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기적적으로 고향 땅을 다시 밟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체포 소식에 몸져누운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후였다. 지학순은 어머니 무덤 앞에서 결심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신부가 돼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내리라.” 지학순은 윤공희 부제와 월남, 혜화동 신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이 뜨거운 신학생
 

혜화동 신학교에서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한국전쟁이 터졌다. 함경남도 덕원에서 출발해서 평양을 거쳐 서울에 오고, 부산 피난 중 입대해 다시 평남 맹산까지 진군했다가 부산 제3 육군병원에서 제대하는 지학순의 파란만장한 신학생 시절이 이렇게 써내려져가고 있었다.
 

그는 전쟁 중 드러난 인간의 어두운 면과 동료들의 죽음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한번은 동료 전사자의 집에 가 사망 통지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솟구쳐 나오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 그는 돈이 될만한 물건을 챙겨 다음날 다시 그 집을 찾아 가족에게 건넨 후에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부대가 강원도 원주로 이동했을 때는 안토니오 소콜 신부와 신자들 사이에 통역을 한 일이 있었다. 공소에서 고해성사를 통역하고 부대에서 약을 구해 아픈 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소콜 신부는 지학순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이것이 사제들이 사는 보람이지. 굶주린 영혼들에 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려 주고, 또 아파서 괴로워하는 이를 낫게 해 주고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나. 제대하면 훌륭한 신부 돼서 좋은 일 많이 하게.” 지학순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아무 대답도 못 했다.
 

1952년 12월 15일 지학순은 백민관 신부와 부산 대청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청주 북문로본당 보좌를 거친 후 1956년 윤공희ㆍ이영섭 신부 등과 로마로 유학을 떠나 교회법을 공부했다. 1960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 신학부 교회법 교수로 신학생을 양성하다 1962년 4월, 부산 초장동본당으로 발령 받는다.

 

세상의 빛이 된 주교
 

1962~1965년 열렸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현대 세계에 적응하여 이에 걸맞게 쇄신되어야 한다는 결말을 내놓았다. 그리고 교회는 현대 세계의 인간이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에 주목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1965년 원주교구가 탄생하고 지학순 신부가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지학순 주교는 문장 표어를 ‘빛이 되라(Fiat Lux)’로 정했다. 그는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구의 변화를 꾀했고 평신도들이 본당에서 주인 의식을 갖게 하도록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교황 회칙을 공부하게 하였다.
 

교구 내 광부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운동을 벌이고 교육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960~1970년대 가난했던 지역민들을 위해 전개한 농산물 도농 직거래 개발, 교육 및 사회복지 기관 설립, 정의ㆍ인권 운동을 펼친 모든 일이 세상을 향한 교회 사명을 강조한 공의회 정신과 일맥상통했다. 세상 어느 곳도 교회가 아닌 곳도 없었고 길에서 만난 누구와도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학순 주교. 지 주교에 관한 일화들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한 노신사가 원주 시내 쌍다리 아래서 살던 넝마주이 소년들을 찾은 적이 있었다. 아편 중독자나 걸인들도 있었기에 원주 사람들도 피해 다니는 음습한 곳이었다. 노신사는 “제일 급한 것이 살 집”이라는 소년들의 말에 도움을 좀 주겠노라는 대답을 남기고 돌아섰다. 노신사는 이름을 묻는 사람들에게 “지 주교”라는 말을 남겼다. 성은 지요 이름은 주교, 넝마주이 소년이 볼 때는 참 희한한 이름이었다. 지 주교는 약속대로 넝마주이 소년들에게 아담한 시멘트 벽돌집을 지어 주었다.
 

원주교구 출신 첫 사제로 지 주교를 보필해 교구 총대리를 역임했던 이학근 신부는 한 심포지엄에서 “지 주교님은 성격이 다소 급하고 거칠기도 하셨지만, 광산 사고로 죽거나 다친 광부들을 일일이 방문해 함께 눈물을 흘리셨던 사랑 많은 참 목자셨다”고 회고했다. 매년 자신의 통장을 탈탈 털어 각지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목자였다.
 

지학순 주교는 가난한 자를 등지는 불의한 권력을 미워했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1974년 민청련 사건으로 민주인사들이 수난을 당할 때 지학순 주교도 고통을 함께했다. 1974년 양심선언으로 독재정권은 지 주교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정의는 들불처럼 이 땅에 퍼졌다.
 

1985년 9월에는 지학순 주교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찾아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한국 순교 성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지 주교는 35년 만에 동생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분단의 세월이 긴 만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판이했다. 누이동생이 쏟아내는 말에 지 주교는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니 돌았구만요. 이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거야요?”
 

1993년 3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지 주교는 원주에서 장일순 선생과 함께 육영사업, 신용협동조합 운동, 수재민 구호활동, 노동자 교육, 부정부패 척결 운동, 인권보호 운동,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앞장선 지역 민중의 아버지였다. 지학순 주교 선종 후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법인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을 설립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활동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들을 격려하고자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제정, 매년 시상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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