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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기해박해180주년] 깊은 신심으로 이룬 ‘성가정’과 순교로 지킨 ‘믿음’의 대명사

by 세포네 2019.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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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 순교자 성 정하상·최경환의 가족들 

 

1839년 기해박해 하면, 3위의 순교자가 떠오른다.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 최경환(프란치스코)ㆍ복자 이성례(마리아) 부부다. 정하상은 신유박해 당시 무너진 교회를 1836년 성직자 영입을 통해 다시 일으킨 주역이자 성가정의 열매다. 최경환ㆍ이성례 부부는 아들 여섯 가운데 맏이를 그리스도를 닮은 목자로 봉헌한 성가정의 모범이다. 기해박해 180주년을 맞아 그 두 가정의 모범으로 들어가 본다.

 

▨ 가정의 모범 보인 성 정하상 가정

▲ 마재성지에 설치된 정약종 일가 모자이크. 왼쪽부터 정철상·정약종 복자와 성모님, 정하상·유조이·정정혜 성인

 

정하상 일가는 특별하다. 정약현ㆍ약전ㆍ약종ㆍ약용ㆍ약황 등 나주 정씨 5형제 중 유일하게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복자의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과도 같은 신앙이 둘째 아들 정하상 성인을 통해 조선 교회의 재건으로 꽃피웠기 때문이다.

이들 일가는 특히 일가족 모두 순교와 시복ㆍ시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14년 8월 정약종과 맏아들 정철상(가롤로)이 시복됐고, 이에 앞서 1984년 5월 정약종의 부인 유조이(체칠리아)와 둘째 아들 정하상, 막내딸 정정혜(엘리사벳)가 시성됐다.

정약종은 1786년께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아 오랜 교리 연구 끝에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썼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에 임명돼 공동체를 이끌며 교리교육과 전교에 힘쓰다 1801년 4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아버지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운 정철상 또한 포천 홍교만(프란치스코)의 딸을 아내로 맞아 ‘온 힘을 다해 천주를 공경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순교했다.

정약종과 장남 정철상이 순교한 뒤 풀려나온 유조이와 정하상ㆍ정혜 남매는 마재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 삶은 간난신고였다. 그럼에도 유조이는 바느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남매에게 구전으로 교리와 경문을 가르쳤다.

집안 내 박해가 심해지자 정하상은 교우들 집을 전전하다가 함경도 무산에 유배돼 있던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를 더 깊이 배웠다. 1816년 이후로는 성직자 영입에 주력했고,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1836년 1월에는 첫 서양인 선교사 모방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그해 12월에는 샤스탕 신부를, 이듬해 12월에는 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를 모셔왔다. 한때는 신학생으로 선발돼 신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1839년 체포 직후 박해자들에게 제출한 호교론서 「상재상서」는 아버지의 교리서 「주교요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재에 살던 유조이와 정정혜는 정하상이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자 상경, 성직자들을 정성으로 모셨으나 1839년 7월 9일 체포돼 그해 12월 29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 지킨 성 최경환 가정

▲ 1839년 8월 기해박해로 체포돼 포졸들에게 잡혀가는 최경환 일가와 교우촌 형제자매들. 심순화 화백의 작품이다

 

최경환 성인 일가는 또 다른 신앙의 모범이다. 40일 넘게 서울 좌포도청에서 110대가 넘는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하다가 옥사한 최경환.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 아들을 보다 못해 배교했다가 다시 옥에 돌아와 참수된 이성례. 그의 맏아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21) 신부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새로운 감동이 있다.

최경환 성인의 삶은 조부 최한일, 부친 최인주에게서 3대째 이어진 신앙이 토대였다. 이런 신앙 속에서 최경환은 이성례를 아내로 맞았고, 여섯 아들을 뒀다.

박해의 위협에 충남 청양 다리골(다락골)을 거쳐 한양도성 밖 공덕리, 강원도 김성,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를 전전하는 삶 속에서도 「칠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신심으로 가족을 이끌었다.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최경환은 교리에 해박한 데다 평소 묵상과 독서를 통한 신심 함양에 힘썼다. 이웃과의 나눔이나 극기 실천에 뛰어났고, 예수님과 성인,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하며 가족을 보살폈다. 아들이 신학생이 돼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더 많은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어머니 이성례 또한 맏아들 최양업을 하느님께 바쳤을 뿐 아니라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자녀에 대한 신앙 전수와 훈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삶은 ‘모진 육정을 극복한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로 요약된다.

남편 최경환, 젖먹이를 포함한 다섯 아들과 체포된 그는 포도청에서 110대가 넘는 곤장을 맞으면서도 굳세게 신앙을 증거했지만 막내 스테파노가 옥중에서 굶어 죽어가는 걸 보고 마음이 약해져 일시 배교했다. 그러나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 뒤로는 다시는 순교의 원의를 잃지 않았고, 1840년 1월 서울 당고개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부모와 동생들의 기도는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이라는 기쁨을 이들에게 안겼다. 조선인으로는 첫 번째 신학생에 선발된 최양업은 1849년 4월 상해에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랴오뚱 차쿠성당에서 중국인을 사목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선교사가 됐고, 마침내 조선에 들어와 11년 6개월간의 사목을 통해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됐다.

기해박해로 아버지, 어머니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최 신부의 ‘눈물 섞인’ 소회가 서한을 통해 오늘에까지 전해진다. “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1844년 5월 1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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