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막 - 신앙의 자유를 얻다
100여 년간 조선에서 박해를 받아온 가톨릭 교회는 1886년 조불조약 체결로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선교사들은 거주와 활동이 보장됐고, 선교가 부분적으로 허용됐다. 1895년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경복궁에서 고종을 만났다. 고종은 지난 시기 박해에 유감을 표했다. 이 땅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명문화된 것은 1899년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서였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가톨릭 교회는 성당 건립 등 교회 발전에 힘썼다.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던 명례방에는 1898년 한국 교회 첫 번째 주교좌성당이 세워졌다. 신자 수가 날로 늘어나 1911년 교황청은 조선대목구를 경성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했다.
또 박해 시기 순교자들에 관한 시복시성 운동이 시작됐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며 그 안에 그리스도인 삶의 원천이 있다고 인식하고 순교 목격 증인들을 찾아 나섰다. 한국 교회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순교적 삶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고 신자들에게 가르치며 순교 신심과 순교자 현양 운동을 보급했다.
▲ 조불수호조약통상문 |
조불수호통상조약문(朝佛修好通商條約文)
1886년 6월 4일 조선 측 대표 김만식과 프랑스 측 대표 코고르당 사이에 조인된 조불수호통상조약문. 이 조약으로 조선과 프랑스 간 통상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조약 체결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교회의 선교 자유 허용을 요청해 양국 간에 난항을 겪었다. 어렵사리 협상한 끝에 “언어와 문자, 법률과 예술 등을 가르치고자 조선에 가는 프랑스 국민은 우호적인 도움을 받을 것이다”(제9관)라는 조항을 넣기로 합의하면서 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7막 - 또 하나의 시련 : 일제 강점기와 민족의 분단
▲ 뮈텔 주교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로 일상 안부를 묻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조선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박으로 일방적으로 맺은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상실했다. 고종은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외국의 지원을 기대했다. 미국, 러시아, 영국 등에 호소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관철하고자 한 것이다. 1880년대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문에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명시하고 있어 고종은 이 원본을 지키고자 했다. 고종은 이 통상 조약문을 근거로 1907년 5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파견해 국제 사회에 이를 호소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종은 이 조약문들을 비밀리에 뮈텔 주교 서고에 감췄다.
이 사실을 이완용과 조남승이 일제에 고발했고 통감부는 뮈텔 주교에게 조약문의 반환을 요구했다. 뮈텔 주교가 거부하자 1910년 5월 6일 조남승과 김조현이 일본인과 함께 고종의 친서를 들고 와 뮈텔 주교에게 조약문이 보관된 상자를 줄 것을 요구했다. 고종의 친서를 확인한 뮈텔 주교는 그들에게 프랑스와 미국 등 열강과 맺은 조약문의 원본들이 들어있는 상자를 내줬다. 이후 일본과 매국노들은 수순대로 그해 조선을 강제 병합했다. 조선은 이렇게 망했고, 뮈텔 주교는 그 멸망의 증인이었다. 이로써 한국 가톨릭 교회는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된다.
일제는 학교 설립을 규제했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 시기 가톨릭 교회는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했고, 신자들은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6ㆍ25전쟁과 분단의 시련 속에서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피살됐다. 휴전 이후 북녘 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경천
‘경천’은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가 1910년 3월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앞두고 일본인의 부탁을 받고 쓴 유묵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안 의사의 유묵 64점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다. 이 유묵은 안 의사의 휘호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경천(敬天)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앞 두 글자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는 홍익인간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윤리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유묵에는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글씨와 왼쪽 손 약지를 자른 채 찍은 손도장이 있다.
안 의사는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독립운동가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신심은 개인의 구원에만 그치지 않고 민족 구원 사상으로 승화해 일제 강점기 독립전쟁과 1909년 하얼빈 의거로 표출됐다.
그는 1898년 황해도 청계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영세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그는 하얼빈 의거 직전에도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바쳤다. 안 의사는 순국 직전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고국으로 옮기지 마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할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향한 결의를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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