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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미술이야기

어려운 사람들의 성인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by 세포네 2017.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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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르치노,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와 천사>, 1656년, 캔버스에 유채, 194x177cm, 사바우다 갤러리, 토리노, 이탈리아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녀 프란치스카((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 1384-1440)가 길을 갈 때마다 성녀의 수호천사들이 언제나 길을 인도하고 밝혀주었고 성녀를 위험에서 구해주었기에 성녀 프란치스카를 운전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 때문인지 로마에서는 매년 3월 9일에, 수호성인의 은총을 몸소 체험하려는 마음에 자동차를 가지고 나오는 운전자들이 평소보다 많아 교통 체증이 다른 날보다 심하다고 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 구에르치노(Guercino, 1591-1666)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요청으로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를 주제로 제단화를 제작했다. 성녀는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서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던 부유한 귀족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하느님께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자 했지만, 겨우 12세에 한 귀족 청년과 결혼을 했다. 여러 아이를 낳아서 모두 건실하게 교육하고 행복하게 살았던 성녀는 영적 생활과 더불어 자선사업에 열의를 다했다. 빈민과 병자를 돌보며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간호했다. 흑사병과 기근이 닥쳤을 때,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가며 병자나 빈민의 구제에 애썼다. 그러나 성녀는 흑사병으로 두 자녀를 잃었고, 내란으로 재산을 약탈당했고, 군인이었던 남편이 추방되는 쓰라린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성녀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사업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느낀 성녀는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을 모아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렇게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성 베네딕도회 회칙을 따르는 수녀회가 1433년에 창설되었다.

 화가는 검은색과 흰색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복을 입은 성녀를 묘사함으로써 그녀가 베네딕도 수도회의 엄격한 규범을 준수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성녀가 손에 펼쳐 든 책 속의 글은 분명하지 않지만, 구에르치노가 1636년에 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에서는 시편 73, 23-24의 말씀이 확실히 나타난다.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이다.” 이를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따르겠다는 성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래 놓인 바구니 안에 가득한 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성녀의 자선행위를 나타낸다. 광주리에 담긴 빵은 마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시킨다.

 성녀의 바로 옆에는 수호천사가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우리를 향해 바라보고 있다. 성녀는 평소 수호천사와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가 아들을 잃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수호천사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성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보살피는데, 수호천사는 그림자처럼 성녀를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어두운 밤에는 등불을 비춰 주었다고 한다. 언제나 하느님을 섬기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생을 살고 싶었던 성녀는 남편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수녀회의 일원이 되지는 못했으나, 1436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아들과 손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도회에 입회했다. 성녀는 1440년에 병석에 눕게 되었고, 그 해 3월 9일 짧은 수녀원 생활을 뒤로한 채 선종했다.

 

“언제나 저를 지켜 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저를 비추시고 지켜주시며 인도하시고 다스리소서. 아멘”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

윤인복 소화데레사 교수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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