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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미술이야기

유다인들의 임금

by 세포네 2016. 12. 4.

 

안토넬로 다 메시나, <십자가 처형>, 1475년, 패널에 유채, 52.5X42.5cm,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

 

서양미술사에서 <십자가 처형> 작품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심과, 그리스도의 일생과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성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되면서였다. 수많은 화가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양한 표현으로, 즉 고통을 초월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모습부터 예수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30-79년경)는 그림 맨 왼쪽에 ‘1475년,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렸다.’라는 화가의 서명을 라틴어로 적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죄명 패가 붙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과 두 죄수, 그리고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거의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였던 사도 요한이 슬퍼하고 있다. 모은 두 손을 무릎에 내려놓은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에 슬픔을 넘어 체념한 듯한 모습이고, 무릎을 꿇은 사도 요한은 두 손을 힘껏 모은 채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리스도는 골고타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고요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자갈과 모래가 뒤덮여 있으며, 해골과 사람의 뼈가 널려 있다. 예수님의 수난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 해골은 자주 그려진다. 이것은 중세 사람들이 인류 시초인 아담이 골고타 언덕에 묻혀 있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담의 해골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시작된 원죄를 의미하며, 또한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 피로 깨끗이 씻겨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십자가의 수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서막인 셈이다.

 중앙에 숨을 거둔 예수님의 양옆에 두 명의 죄수는 온몸이 뒤틀린 상태로 나무 기둥에 가죽끈으로 묶여 있다. 예수님과 두 죄수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많이 연구된 인체 해부학에 대한 중요성을 드러내면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님 양옆의 두 죄수 중에 누가 ‘선한 죄수’ 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발버둥치는 듯한 두 죄수의 모습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예수님의 균형 잡힌 평온한 몸의 형태와 상당히 대조를 보인다. 죽음의 면전에서 한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라고 하였다. “땅에서 들어 올려져”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너는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회개한 죄수를 자신에게 이끌어 그를 아버지께 인도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머리를 ‘선한 죄수’를 향하고 계신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던 그림 오른쪽의 죄수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림 맨 앞에 있는, 빛을 싫어하는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처럼 이 죄수는 진정한 믿음의 빛을 외면하여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화가는 이들의 회개 여부에 따라 몸의 뒤틀림 정도를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 밑 부분의 뒤편에는 밑동이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인간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


윤인복 소화데레사 교수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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