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헐, <바벨탑>, 1563년, 목판위에 유채, 114×155㎝, 미술사 박물관, 빈, 오스트리아
그림 전체를 거의 지배하고 있는 탑은 ‘바벨탑’이다. 창세기 기록에 따르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4)고 했다. 이들은 단단히 구워낸 벽돌로 거대하고 높은 탑을 쌓아 올리려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닿으려 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일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소통을 못 하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막으셨다. 탑은 미완성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온 땅에 뿔뿔이 흩어졌다.
이 탑을 바빌로니아에서는 밥일루(Bab-ilu, ‘신의 문’이란 뜻)라고 불렀는데, 히브리어로 바벨(Babel)이라 했다. 바빌로니아에서 자리를 잡은 수메르인들은 높은 산이나 언덕에 ‘지구라트’라는 탑을 올리면서 신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내디딜 발 받침대로 여겼다고 한다. 탑을 하늘과 지상을 통하는 출입구처럼 보았다. 바벨탑은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피터 브뤼헐(Pieter Bruegel de Oude, 1525경-1569)이 그린 바벨탑은 현재 두 점이 남아 있다. 두 점의 작품은 그 크기의 차이로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된 <큰 바벨탑>과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에 소장된 <작은 바벨탑>으로 구별된다. 두 바벨탑은 모두 고대를 배경으로 건설현장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브뤼헐은 당대 현실에 적합한 배경으로 탑 건설 자재를 수로를 이용하여 수송할 수 있는 연안을 부지로 택하였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바벨탑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거대한 탑 뒤에는 당대 최대의 바빌론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왼쪽 아래에는 니므롯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석수들의 작업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왕의 발치에 한 석수가 양쪽 무릎을 꿇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군주 앞에 백성이 한쪽 무릎만을 꿇는 것과는 달리 양쪽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는 이 왕이 중동 출신임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가 동방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추형의 바벨탑 내부 건축 구조는 로마의 콜로세움과 흡사하다. 그림을 보면 탑은 처음부터 수직으로 곧게 솟아 올려지지 않고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쌓아 올려지고 있다. 기우뚱한 탑은 균형 감각을 잃고 있다. 그리고 공사는 선후관계가 바뀌어, 아래층이 완성되기도 전에 위층을 쌓아 올리고 있다. 이 공사가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결국, 화가는 탑은 무너지고 말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당시 플랑드르(Flandre) 지방은 외부적으로는 스페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으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고, 그들의 좌절감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브뤼헐이 보기에 당시 사회는 멸망 직전의 바빌론이나 로마와 닮아있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끝없이 탑을 쌓아 올리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욕망이 바빌론인이나 로마인들의 욕망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울어진 탑처럼 사회는 균형 감각을 잃었고, 선후관계가 뒤바뀐 공사처럼 사회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평화를 잃게 될 것이다. 욕망과 소유를 모두 버리지 않는 사람은 하늘의 탑을 결코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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