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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묵상글

어머니다운 밥상

by 세포네 2010. 4. 9.


 

 

 


        저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중에서도 아주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저도 따듯한 사람인데
        사랑 못지않게, 아니 사랑보다도

        훨씬 더 많이 교만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가 양성을 담당하며 저지른

        수많은 악행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주 젊은 나이에, 아니 어린 나이에
        형제들의 양성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

        저는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제가 할 역할은 악역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이 역할을 담담하게 수행하겠습니다.”
        자극적으로 풀어 얘기하면,
        죽여주는데, 눈 깜짝하지 않고 죽여주겠다는 얘기지요.
        저는 정말 형제들을 사랑했기에(교만한 착각이 많이 들어갔지만)
        정말로 형제들을 눈 깜짝하지 않고 죽여줬습니다.

        어제 말씀 나누기에서 저는 눈을 감는 경우를 얘기했는데,
        눈을 감는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눈 딱 감고 죽이는 경우지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모기를 죽이곤 합니다.
        한 동안 죽이지 않던 모기를 죽이게 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부터입니다.
        잠을 잘 못자면 다음 날 영향을 많이 받게 되면서
        눈을 딱 감고 모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모기도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죽일 수 없기에
        눈을 딱 감고 죽여만 죽일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도 저는 그런 고민을 반복할 것입니다.
        생명을 생각하며 모기에게 뜯기다가도
        ‘에라 모르겠다!’ 하며 눈 딱 감고

        모기를 죽이는 것의 반복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심사로

        눈 깜짝하지 않고 형제들을 죽여줬는데,
        어쩌다 제가 형제들에게 다른 짓을 하기도 합니다.
        형제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밥상을 차려주는 일이지요.
        특히 저하고의 양성을 마치고 떠날 때

        마지막 여행을 같이 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짓을 하는 것입니다.

        밥을 짓고 밥을 차려주는 것,
        어머니의 밥상을 한 번 선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번 보여주는 것이고
        모진 짓 많이 했으니

        미안하기도 하여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라도 받은 상처의

        작은 치유가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얼마나 살과 피가 있는 사랑입니까?
        관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만 간절한 사랑도 아닙니다.
        몸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손끝까지 사랑을 하고
        손가락의 지문까지 사랑을 하시는 사랑입니다.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어미가
        사랑이 최대한 담겨있는

        마지막 식사를 자식에게 지어 먹이듯
        최후의 만찬의 재현으로서

        밥상을 차리시고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죽음으로 스승을 떠나보낸 그 상실과
        밤새도록 일하고도 허탕을 친 그 수고로움을
        따듯하게 감싸고
        위무하며
        새 힘을 주는 밥상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작은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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