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유는 우선, 하느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가르치려하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왜 당신 재산을 우리에게 맡기실까? 당신이 직접 관리하시지 않고 왜 우리에게 맡기실까? 하느님께서 당신 재산을 우리에게 맡기심은 당신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이것 말고도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재산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비유에서 말하는 미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늘 비유를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은 한 미나를 주시고
우리에게 돈을 벌라고 요구하시는 분이고 그 결과를 나중에 따지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정말 당신의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우리 인간에게 돈을 빌려주시는 분이실까? 오늘 비유의 세 번째 사람은 하느님을 이런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를 상대로 악착같이 돈벌이를 하시는 분. 능력은 조금 주시면서 많은 성과를 요구하시는 지독한 분. 은총은 베풀지 않고 우리의 봉사와 희생만 요구하시는 분.
그러나 이 세 번째 사람을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당신의 미나를 맡기시고, 미나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미나를 맡기시는데, 미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이고, 그러므로 그 은총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사랑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사랑은 우리를 흡족케 할 뿐 아니라 마치 유산균이 저절로 증식하듯 커지고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할 경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이 은총이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데 맡겨진 짐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그 풍요와 활력과 찬란함을 잃고 나의 가장 음침한 뒷방에
처리 곤란한 짐짝처럼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유산균으로 치면 그 균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사랑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지 않으시렵니까? 사랑이 없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하고 유쾌하고 쉽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을 그렇게 짐스럽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사랑하기 어려워하고 힘들어합니까?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일까요? 한 번도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사랑 받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인 내가 그럴 수 있고 인간인 나의 부모와 형제와 친구가 그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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