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 <2>
빛 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 입니다.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小心症)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日常)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 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살게해 주십시오.
당신은 내 생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線).
그리고 내 생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점(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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