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기에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꿈이 아련한 기억 속으로 넘어갔지만,
지금은 바람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부모님이 건강하시길 바라는 마음,
좀 더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바로 이 꿈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면서
우리의 희망과 꿈은 기억 너머로 넘기고서는 불평을 시작합니다.
오늘 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구해주셨다는 사실,
즉, 이집트에서 탈출시켜주심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각종 축제일을 지내며 이를 기념하였지만,
거인들과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는 커다란 시련이 다가오자,
지레 겁을 먹고 하느님께 투덜거립니다.
그런데 동일한 상황에서도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은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이방인이라고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녀를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 딸을 치유할 수 있다 믿으며
철저하게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배척당하는 이 가나안 여인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느낀 것은 바로 절실함입니다.
그녀의 꿈, 그녀의 희망,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딸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이 절실함 때문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설움과 핍박에도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에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종살이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탓합니다. 얼마나 부질없는 짓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현실과 타협하여 현실에 고통과 어려움 속에
우리의 꿈, 희망을 잃은 채 뒤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절실한 적이 있었습니까?
오늘 하루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희망과 바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믿음이 절실함으로 나타나는
고통에 눈물겹지만
미소는 잃지 않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작은형재회 이대건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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