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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묵상글

숙성된 은총

by 세포네 2009. 7. 3.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 사도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나는 믿을 수 없고
        그래서 믿지 않겠다는 뜻일까?

        오늘 복음을 몇 차례 거듭 씹고 또 씹으니
        이 말씀은 믿을 수 없고,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고 싶다는 뜻으로 읽혀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부활을 향유하는데
        자기만 그 대열에서 제외되고 소외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자신의 그런 처지가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없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에 대해
        예수님께 서운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10대, 20대 때 저도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
        그중에서도 성인들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소외감,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약이 오르면서 오기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꼭 한 번 하느님을 만나야겠다.”
        토마 사도가 눈으로 직접 보고
        손가락으로 상처에 넣어봐야겠다는 것도
        이와 같은 심사가 아니었을까요?

        복음에 보면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나옵니다.
        토마 사도가 있을 때 나타나시고
        나타나셔서 이내 토마 사도를 향하시는 것을 볼 때
        토마 사도를 위해 일부러 또 나타나신 것이 분명합니다.
        토마 사도에 대한 배려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가요?
        저의 경우에는 약이 올라 하느님 체험을 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하느님은 오히려 더 저만치 멀어지시고,
        그러다가
        저의 시도가 다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느님이 나타나시던데....
        그것도 시일이 한참 지난 뒤에 나타나시던데
        토마 사도에게는 여드레 만에 그렇게 쉽게 나타내 보이시다니....

        그러나 이 여드레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애타는 사람에게는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드레는 열망이 은총을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고
        은총이 숙성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는 너무도 감읍하여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은
        오래 생각한 신학적 토로가 아니라
        은총이 선사한 신앙의 토로입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 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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