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내주고 하늘로 간 꽃동네 배동순 할아버지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생전의 배동순 할아버지(위 오른쪽)와 김수환 추기경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
하느님을 찾다 닮아버린 '거지 예수'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조그마한 앰뷸런스가 꽃동네로 들어온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이렌 위에는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앉았다. 외롭지만 행복하게, 많은 꽃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한 사람이 떠나갔다.
안구와 시신을 기증한 거지 할아버지. 그 질곡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주신 고통을 ‘선물’로 여기며 삶으로 그분을 증거한 사람. 오래 전 김수환 추기경은 그를 ‘살아있는 예수’라 불렀으며 우리는 그를 배동순(베드로, 81)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빌어먹으며 신앙에 눈떠
배동순 할아버지가 거지가 된 사연에는 그의 질곡어린 삶이 숨어있다.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찾아온 소아마비, 병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차별받으며 살아온 한 세상,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동생들의 전쟁 중 사망, 그리고 아버지의 위암 선고.
밥을 빌어 아버지의 병수발을 시작한 것이 ‘거지’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빌어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많은 부끄러움을 가져다 줬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에 눈을 뜨게도 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비로소 자식으로 인정했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며 제천본당 주임신부에게 대세와 종부성사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그의 눈에 황홀하기만 했던 그 성당, 그곳에서 ‘진짜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와 가장 크다는 명동성당을 찾았다.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을 눈에 담고 싶었다. 냄새나고 더러운 모습으로 성당에 오자 신자들이 끌어냈지만 다시 제대 앞으로 나아가기를 한달여.
마침내 신자들은 그를 신자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배할아버지의 승리다. 그 후 할아버지는 28년간을 새벽미사, 장례미사, 혼배미사까지 하루에 5~6대의 미사를 빠지지 않고 봉헌하며 살아왔다.
미사봉헌을 위해 낮에는 동냥을, 밤에는 성당 안 문화원 바닥이나 처마 밑 또는 종탑에서 쪼그려 잠을 잤다. 명동성당은 그런 할아버지를 위해 뒤편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해줬다.
동냥해 모은 돈은 명동성당 보수공사에 모두 봉헌했다. 가출한 청소년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아 상담해주고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인은 모두 가톨릭으로 이끌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가톨릭으로 입교한 사람들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안구와 시신’ 이웃에게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명동성당을 방문한 후 그는 꽃동네에 입소했다. 꽃동네에서도 그의 헌신적인 사랑은 계속됐다. 굽은 허리로도 묵주를 놓지 않았으며 꽃동네 가족을 돌보고 매 순간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지난 10월 8일 그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하느님께로 갔다. 생전의 마지막 소원대로 안구와 시신은 가톨릭 강남 성모병원과 가톨릭 의대에 기증됐다.
장례미사 날, 배할아버지의 꽃동네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가 꽃동네에 울려퍼진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신다. 하지만 죽고 나면 바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내가 제일 무서운 것은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 무서운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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