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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46) 6월 항쟁, 그 위대한 승리

by 세포네 200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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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국민의 위대한 승리’ 거머쥐다

“전두환 대통령은 7월 1일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의 ‘시국수습 8개항’ 제의와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이를 전폭적으로 수락한다고 천명했다. 이날 오전 10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적으로 발표된 특별담화에서 전대통령은 6월 29일 노대표가 제의한 직선제 개헌, 대통령 선거법 개정, 사면 복권 및 구속자 대폭 석방, 기본인권 최대한 신장, 언론 자유 보장, 지방 및 교육자치제 실현, 정당활동 보장, 사회비리 척결 등 8개항의 시국 수습 방안을 수락하고 임기 중 이를 적극 추진해나가겠다고 밝혔다.”(가톨릭신문 1987년 7월 5일자 1면 중에서)

양심을 부르짖은 6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이후 국민들의 불신은 절정에 이르렀다. 정부는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중단하는 ‘4.3 호헌 조치’를 선언했고 민주 개헌에 대한 갈망은 깨어졌다.

분노와 팽팽한 긴장이 일었다. 한국 정의평화위원회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5월 4일 오후 6시30분 명동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 주례로 ‘민주화와 정의평화 구현’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최초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항의 단식 농성에 들어갔고, 각 교구 사제단이 뒤를 이었으며 학계, 언론계, 재야, 나아가 전 국민으로 개헌 서명 운동이 확산됐다. 김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도 애석함을 토로했다.

5월 18일 정평위가 주최한 ‘5.18 광주 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 미사’를 마친 후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11개항으로 된 성명서를 통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검찰과 치안본부가 이를 부정하자 22일 제2차 성명서를 통해 박종철 뿐 아니라 부천서 성고문사건, 김근태씨 고문 사건, 범양사건 등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촉구했다. 이같은 폭로는 정권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었다. 26일 국무총리, 안기부장, 내무부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이 경질됐다.

범국민적 저항이 불붙었다.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고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 주최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성명을 발표, 모든 신자와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대회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했다. 국민대회에 참여했다가 연대 이한열군의 최루탄 사망을 항의하는 동시에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에 들어간 학생과 시민들은 6일간 계속해 농성을 벌였다.

18일에는 최루탄 추방대회, 26일에는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됐다. 특히 26일의 대행진에는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동시에 열려 경찰의 봉쇄를 뚫고 100만 여명이 참가함으로써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목마름을 그대로 드러냈다. 명동성당 뿐만 아니라 전국의 성당들이 시위 대열의 피난처요 농성장이 됐다. 87년 6월은 이렇게 온 나라가 매일 시위로 시작해 시위로 마쳤다.

결국 6월 29일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항복 선언을 했다. 이에 대해 교회는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평가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표시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담당 윤공희 대주교는 노대표의 6.29 선언과 전대통령의 수락 담화 발표와 관련 ‘그동안 표출된 국민의 의사를 굴절 없이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적극 환영하고 지지한다’고 말했다.

빛이 어둠을 이겼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폭로에서부터 호헌철폐를 위한 각 교구 사제단의 단식농성, 6월 항쟁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은 그대로 시대적 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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