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33) 1980년 광주민주항쟁 발생

by 세포네 2007. 3. 18.
728x90

1980년 6월 1일자 가톨릭신문 1면

“한 핏줄 한 형제, 유혈 충돌 만은 말아야”

“지난 5월 23일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가톨릭신문 1980년 6월 1일자)

광주 돕기 모금운동

가톨릭신문(1980년 4월 1일부터 ‘가톨릭시보’에서 ‘가톨릭신문’으로 제호 변경)에 처음으로 광주민주항쟁이 비쳐지기 시작한 것은 그해 5월 25일자부터였다. 1면 중앙에 2단 크기로 짤막하게 나온 기사는 다음과 같다.

“21일 오후 1시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민족복음화대회’가 최근 시국과 관련, 무기연기됐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실만 보도한 이 기사에서 ‘최근 시국’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지는 보도만으로는 알 수 없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에 이은 12.12사태, 그리고 80년 5월 광주….

이렇게 시작된 80년대에, 당시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교회는 광주와 광주대교구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을 하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회개하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는 지혜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6월 1일자 지면에는 ‘광주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1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에서는 광주민주항쟁과 관련해 5월 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형제적 和解 기반 마련해야’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위와 같이 보도했던 것이다.

같은 날 신문에는 ‘광주 성직·수도자 전원 무사’, ‘김재덕 김남수 주교 광주 방문 실패’, ‘전주 사제단 광주 희생자 위로 미사’, ‘전국 각 교구장 각 본당에 신자들 기도 당부 서한 보내’, ‘서정길대주교 담화문 발표, 구호금품 모집 등 호소’등이 보도돼 행간에 숨은 긴박함을 엿보게 했다.

주교상임위는 23일 서한 발표 후 27일 긴급회의를 열고 6월 1일 주일에 광주 지역 복구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각 본당에서는 25일 주일 미사 때 서한문을 낭독하고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다.

주교들이 광주대교구청을 방문한 것은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와 성 베네딕도회 수련장 진 토마스 신부 등이 광주대교구청을 방문했다.

전국에서는 헌혈운동, 성금 모금 등을 전개하고 유족들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이후 가톨릭신문은 지속적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구호금품 모집과 전달, 오태순 장덕필 신부 등 7명의 광주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계엄사령부에 연행된 사실 등과 관련한 후속기사를 보도했고 6월 8일자에는 사설 ‘광주민에 마음의 구호를’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광주에 대한 소식은 언론 보도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0년 7월 6일자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아 발표된 김수환 추기경의 담화문 기사에서도 전혀 아무런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광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강요된 침묵과 절망으로 묻혀갔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전두환 국보위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듬해인 1981년 3월 8일 취임식을 가졌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