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교회와 영성]/한국순교자245

(9) 말씀을 위해 살던 궁녀·농부·상인들 서로 다른 삶, 믿음만은 하나 - 궁녀로 생활하다가 궁 안에 삼엄한 치안·경계로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렵게 되자 궁을 떠났던 전경협 성녀(탁희성 작). 체포 후에는 궁녀였다는 이유로 더욱 모진 형벌을 받다가 참수형을 당햇다. - 최양업 신부가 입국한 후 신부의 복사일을 맡았던 조화서 성인(탁희성 작). 조화서 성인과 그의 아들 조윤호는 부자가 모두 농부였으나 땅을 버릴 지언정 믿음을 버리지는 못했고, 결국 함께 순교했다. - 1839년 체포됐으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던 전장운 성인(탁희성 작). 그는 후에 배교한 것을 깊이 뉘우쳤고, 목판인쇄로 교회 서적을 만드는 일을 했다. 1866년 교회 서적이 적발되어 체포됏다. 103위 성인들의 모습을 보면 힘든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애.. 2009. 4. 19.
(8) 선택받은 과부들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 옥에서 4년을 보내면서 모진 고문을 받은 이소사 성녀(탁희성 작). -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와 망건을 만드는 일을 하며 간신히 노모와 생계를 이어갔던 김업이 성녀(탁희성 작). - 포졸들에게 묵주를 증거로 보이며 자수하는 이매임 성인(탁희성 작). 성경에 등장하는 ‘과부’ 이야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카 21,1-4)’이야기다. 부자들이 헌금함에 큰돈을 넣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시던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넣자 제자들을 불러 이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2009. 4. 5.
(7) 오직 하느님의 배필, 동정녀들 “오직 주님만 섬기기 위함입니다” 이영희…혼담 피해 호랑이에 물려간 것처럼 꾸며 이영덕…혼인 강요받자 어머니·동생과 함께 가출 김효임·효주…덕행·극기로 혹독한 형벌 견뎌 김루치아…심문 중 논리적 대답으로 형관 감동시켜 - 자수하기 전까지 실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던 이영희 성인(탁희성 작). - 부친이 강제로 혼인시키려하자 혈서를 써 동정의 뜻을 구하려 한 이영덕 성인(탁희성 작). -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13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은 성 김효임·성 김효주 동정자매(탁희성 작). ‘동정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동정’을 지켰던 순교자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교리지식을 통해 그러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한 ‘동정’의 극기가 당시.. 2009. 3. 29.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3) 권상연 야고보 권상연 집에서 위패를 찾는 관헌들 ▲ 위패를 찾는 관헌(제14도).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신주를 없애 버렸다는 소식에 관헌들이 그의 집을 수색해 뒤뜰에 묻힌 위패를 찾고 있다. 권상연은 윤지충(바오로)의 외사촌 형으로,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는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했다. 1787년쯤이었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권상연의 고모) 상을 당하고 나서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이 유교식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도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사태가 확산되자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고 한다. 체포령을 피해 한동안 숨어 있던 권상연과 윤지충은 윤지충.. 2009. 3. 29.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2) 주문모 신부 최인길에게 세례를 주는 주문모 신부 ▲ 최인길에게 세례성사를 주다(제16도).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인 주문모(야고보,1752-1801) 신부가 최인길(마티아)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 강남 소주부 곤산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북경교구 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 명령을 받은 주 신부는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어렵사리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주 신부는 한양에 도착, 계동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부활절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입국 사실이 탄로나는 바람에 주 신부는 .. 2009. 3. 29.
(6) 가진 것 다 버리고 오로지 신앙에만 순명 - 이광헌 성인이 체포되어 곤장을 맞는 모습(탁희성 작). - 회장으로 임명된 후 교우들이 성사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했다가 체포된 남명혁 성인(탁희성 작). - 신유박해때 경상도 단성(현 경남 산청군)으로 유배돼 30여 년간 머슴살이를 했던 남이관 성인(탁희성 작). ▨ 이광헌(李光獻) 일가 4인 이광헌 일가 “세상에서 가장 중한 것이 종교” 모진 박해에도 열성적 신앙 드러내 ▲ 이광헌은 경기도 광주 이씨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다. 하지만 서른에 천주교를 알게 되어 부인 권희, 동생 이광렬과 함께 입교한 이후로는 방황을 깊게 뉘우치고 새 삶을 살았다. 세례를 받은 후에 가족과 함께 박해를 피하여 여러 차례 피신을 다니면서 가산을 모두 써 버렸기에 나중에는 거처할.. 2009. 3. 22.
(5) 정하상의 유년의 뜰, 마재성지 정약현·약전·약종·약용 4형제 탄생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정씨집안 4형제가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정하상과 정정혜, 유조이가 생활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하상은 이곳에서 가문의 모진 핍박을 받았지만 굳센 영혼으로 극복해 나갔고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를 배우며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했다. 마재는 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마현이다. 의정부교구에서는 2008년 9월 28일 이 지역을 기념하기 위해 마재성지를 축복했다. 성지는 한옥 성전과 전시관, 만남의 방을 갖추고 있으며 약종 동산에는 십자가의 길과 예수성심상, 성모자상을 모셨다. 바오로 해 특별 전대사 지정지이기도 하다. - 가는 길 서울에서 양수리 방면으로 가다 능내역을 지나 굴다리 통과 후 우회전하면 마재 다산 기념관과 정약종.. 2009. 3. 22.
(5) 정하상의 벗들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사제 영입 앞장 유조이 - 핍박 견디며 아들 정하상·딸 정혜에게 구전 교리교육 정정혜 - 신앙 모범보이며 오빠 정하상 도와 선교사 처소 돌봐 유진길 - 정하상과 함께 교황청에 성직자 영입 청원서 보내조신철 - 북경 교회와의 연락·성직자 영입 운동에 깊이 관여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시작, 정하상에게도 ‘벗’이 있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어머니 유조이와 동생 정정혜 등 가족은 물론, 북경 왕래의 훌륭한 동행자 유진길과 조신철이 그들이다. 초대 교구장의 임명도, 사제 영입이라는 기쁜 소식도 모두 그들의 작은 힘에서 시작됐다. 가톨릭신문은 김대건 신부의 벗들(2009년 2월 15일자)에 이어 103위 성인에 속한 ‘정하상의 벗들’을 알아본다.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면 조안리에는 마재성지.. 2009. 3. 15.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탁희성 화백 그림과 약력은 한국교회사 주요 사건. 순교자 삶 그려 ◇ 어떤 그림들인가 이번에 연재하는 고 탁희성 화백 그림들은 고인의 둘째 아들 탁동호(시몬, 68)씨가 소장하고 있는 고인의 원본 작품들이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교회사 주요 사건들과 인물들, 특히 순교자들의 삶을 그들의 행적이나 직업 또는 순교 장면 등에서 특징적 면을 화제로 삼아 가로 58㎝ 세로 47㎝ 화폭에 담고 그 한쪽에 생애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아들 탁동호씨가 소장하고 있는 유작은 208점. 이 가운데 전시나 표구 등을 하기 위해 배접(褙接)을 댄 작품이 168점이고 배접을 대지 않은 원판 그대로 작품이 40점이다. 배접을 댄 168점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인 이벽(세례자 요한, 1745-1785)부터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인 하느님의 종 김사.. 2009. 3. 8.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천주교식 장례에 화를 내는 종친들 평화신문은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이번 호부터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을 연재한다. 죽정 고 탁희성(비오, 1915-1992) 화백의 유작 성화들을 '하느님의 종 124위'를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신앙선조들의 믿음의 삶을 되새기고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기획이다. 한국 순교자들의 삶과 교회사 관련 성화를 그리는 데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고인의 미공개 성화 작품들을 처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이 모친 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른 것을 안 종친들이 대노하고 있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은 고종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1787년 이승훈(베드로)에게.. 2009. 3. 8.
(4) 김대건 신부와 동료들 ▲한국 최대의 순교 성지인 서소문의 1900년대 전경. 수많은 평신도들이 옥에서 이곳으로 끌려와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참수치명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자들이 당한 고통스러운 형벌들을 세세하게 먹으로 그린 그림.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은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해 고향인 충남 솔뫼에서 가족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경기도 용인 골베마실로 옮겨온다. 김대건 신부는 마카오로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사진은 현재 성지가 조성되어있는 골배마실 모습. 영웅 곁에는 늘 조력자가 있다. 영웅이 영웅다워지도록, 영웅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묵묵히 도와주는 이들, 그들이 바로 조력자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 그 곁에도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신앙’이 목숨을 잃는 이유가 되던 그 시절에 두.. 2009. 2. 15.
(3) 정하상, 핍박 견디며 한국교회 초석 다진 평신도 정하상, 핍박 견디며 한국교회 초석 다진 평신도 ▲정하상(맨 오른쪽) 성인과 동생 정정혜 성녀(맨 왼쪽)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순교와 집안의 비난·핍박으로 고통 받았지만 굳센 신앙으로 극복했다. 두 성인의 신심은 어머니 유조이(가운데)에게서 배운 교리의 영향이 컸다. ▲서소문공원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에는 박해 당시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성인들을 기리기 위한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839년 정하상이 순교한 서소문 밖 형장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3) 정하상,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시작 교황청에 서한 보내 성직자 파견 요청 … 조선교구 설정에 큰 역할 조선 첫 사제인 모방 신부·2대 교구장 엥베르 주교 조선 입국 도와 1839년 9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4세.. 2009. 2. 8.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