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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순교자245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16) 조용삼 베드로 두 아들을 데리고(제57도) 조용삼(베드로, ?~1801)은 경기도 양근 태생으로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병약하고 용모도 불품 없어 서른 살이 되도록 혼례도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서 살게 됐는데 이때 천주교에 대해 듣고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어 교리를 배웠다. 아직 예비신자였던 1800년 4월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나 포졸들이 아버지를 볼모로 삼고 모질게 매질하자 결국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마르티노)의 권면을 받고는 즉시 관청으로 들어가 다시 신앙을 고백했고 경기도 감영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그는 옥중에서 '베드.. 2009. 7. 26.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5) : 이보현 프란치스코 장살 ▲ 포졸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이보현을 장터로 끌고나가 죽도록 매질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이보현(프란치스코, 1773~1800)은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성격이었으나 20살이 넘어 황심(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에는 성격을 고쳤다고 한다. 모친 권유에 따라 결혼한 그는 연산으로 이주해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정사박해(1797)가 일어난 지 한두 해가 지나 연산에서 붙잡힌 그는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로 이송됐다. 배교를 강요 당하면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던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장터로 끌려나가 죽도록 매를 맞았다. 그래도 숨을 거두지 않자 망.. 2009. 7. 19.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4) ]인언민 마르티노 역참에서 역참(제59도) ▲ 고문으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인언민을 포졸들이 말에 실어 해미로 압송하고 있다. 그림 탁희성 인언민(마르티노, 1737~1800)은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황사영(알렉시오)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듣고 교리를 배운 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날, 그는 공주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청주로 압송됐다가 다시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로 이송됐다. 그러나 이미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걸을 수조차 없어 조정 관리들이 이용하던 말을 타고 가야만 했다. 해미 옥에서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지내던 그는 '때려 죽이라'는 관장 명령을 받은 형리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고 돌로 .. 2009. 7. 5.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13) 배관겸 프란치스코 강당을 마련(제60도) 배관겸(프란치스코, ?~1800)는 충청도 당진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돼 입교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체포됐으나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됐다. 그러나 즉시 죄를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고, 고향에서 멀지 않은 면천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에서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정사박해가 충청 지역을 휩쓸던 1798년 10월 3일 양제 마을에서 배교자의 밀고로 붙잡힌 그는 홍주로 압송됐다가 다시 청주 병영(兵營)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형벌을 받았으나 영웅적 인내로 참아내다 마침내 순교했다. 1800년 1월 7일(음력 1799.. 2009. 6. 28.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12) 정산필 베드로 백발의 회장(제76도) ▲ 정산필 회장이 내포 지역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덕산 관아로 끌려가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충청도 덕산 출신인 정산필(베드로, ? ~1799)은 성격이 강직하고 힘이 장사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아주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했다. 그는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주 신부를 찾아가 그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았다. 이후 내포 지역 회장으로 임명되자 열심히 기도하고 독서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1797년 정사박해 여파로 1798년 혹은 1799년에 체포돼 덕산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옥에 갇힌 동료들을 격.. 2009. 6. 21.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11) 원시보 야고보 첩을 내보내다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지 못한 원시보가 집으로 돌아와 첩을 내보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원시보(야고보, 1730~1799년)는 충청도 응정리(현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출신으로 그의 나이 60살 쯤인 1788~1789년에 사촌 동생 원시장(베드로)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했다. 1797년 정사박해 여파로 이듬해에 체포된 원시보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다 형벌을 받아 두 다리가 부러졌다. 1799년 덕산에서 청주로 이송돼 갖은 형벌을 받다가 마침내 그해 4월 17일(음력 3월 13일)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69살이었다. ▲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지 못한 원시보가 집으로 돌아와 첩을 내보내고 있.. 2009. 6. 21.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7) 지황 사바 신부를 영입하는 지황(제62도) ▲ 신부를 영입하는 지황(제62도). 선교사 영입 운동에 가담한 지황이 국경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고 있다. 지황(사바, 1767-1795)은 한양의 궁중악사 집안 출신으로 천주교 소문을 듣고 자원해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973년 성직자 영입 운동 때 북경으로 가 구베아 주교를 만나기도 한 그는 국경에서 주문모 신부를 몰래 만나,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체포된 지황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매를 맞아 순교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그림 / 탁희성 화백 2009. 6. 14.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6) 최인길 마티아 신부로 가장한 최인길(제12도) ▲ 신부로 가장한 최인길(제12도) 포졸들이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고 최인길의 집에 들이닥치자 최인길이 주 신부를 가장해 붙잡히고 있다. 주 신부는 이미 신자들의 도움으로 피신한 후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마티아)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요한 세례자)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은 그의 동생이다. 최인길은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최인길은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2009. 6. 14.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0)] 박취득 라우렌시오 줄로 목을 졸라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은 충청도 홍주 면천 출신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원시보(야보고),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던 그는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했다가 면천 관아에 자수했다. 이후 홍주로 압송돼 온갖 형벌을 받았다. 매를 1400대 이상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마침내 옥졸은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1799년 4월 3일 그의 나이 30살 가량이었다. ▲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옥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2009. 6. 7.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9)] 방 프란치스코 마지막 밥상 방 프란치스코(?~1799)는 충청도 면천 고을 여름이 마을(현재 충남 당진군 면천면 대티리)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면서 이듬해 홍주에서 체포된 그는 6개월 동안 고초를 겪다가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밥상을 받았을 때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교우 2명은 눈물을 흘렸으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리며 그들을 격려했다. 세 사람은 1799년 1월 21일 홍주 읍내에서 함께 순교했다. ▲ 방 프란치스코가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밥상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기쁘게 식사를 하고 있.. 2009. 6. 7.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8) 이도기 바오로 천사가 전하는 말 이도기(바오로, 1743~1798)는 충청도 청양 출신으로 배운 것은 없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이웃에게 권면했다. 박해를 피해 인근 정산에서 옹기를 구우며 지내던 그는 1797년 정사박해 때 체포됐다. 모진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했다. 해가 바뀌도록 옥에 갇혀 있던 그는 마침내 1798년 7월 24일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 천주교를 믿는다고 옥에 갇힌 이도기가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전갈을 받는 환시를 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2009. 6. 7.
(10) 초기 교회의 지도자 공소 회장들 더 많은 교우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 마을 전체를 세례 공동체로 만들었던 김성우 성인(탁희성 작). - 끼니를 때우지 못해 고생하면서도 한국 최초의 고아원 '성영회' 설립 당시 책임을 맡아 고아들을 돌봤던 정의배 성인(탁희성 작). - 대구 관덕정에서 52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윤일 성인(탁희성 작). 공소 운영 및 전교 활동, 신자들의 신앙생활 보조 등을 위해 성직자들이 직접 임명했던 ‘공소 회장들’, 그들은 성직자 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함께 모여 기도할 공간조차 마땅치 않았던 조선시대에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이었다.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하고 선교사들을 숨겨주었으며 주변인들을 권면하여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박해의 칼날이 매서웠던 시기, 그들에게 맡겨진 이 십자가는 너무도 무거.. 2009.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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