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성지(국내)

[청주] 배티

by 세포네 2006. 3. 27.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현재 진천에서 배티를 거쳐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돼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인적이나 차량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해 전국 방방곡곡 거미줄처럼 도로가 뻗어 있는 오늘날에도 그 고적함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서쪽으로 안성, 용인, 서울, 남쪽으로는 목천, 공주, 전라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문경 새재를 지나 경상도로 이어져 박해 시대에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하고 있는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고 이는 다시 순 우리말로 ''배티''라고 불리게 됐다.

 

배티 인근에는 명승지와 성지들이 많이 있어 시간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함께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안성에서 미리내 성지를 거쳐 용인 민속촌과 자연 농원 또는 죽산 칠장사를 거쳐 양지에 있는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 터를 갈 수 있다. 또 남쪽으로는 유관순 기념관과 독립 기념관 그리고 온양 온천이나 현충사를 가는 것도 가능하다.

 

배티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진천으로 가서 백곡을 거쳐 들어간다. 진천에서 백곡행 버스나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백곡에서 배티까지는 약 4킬로미터 정도이므로 도보로 순례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진천에서 18킬로미터 정도 지점에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백곡 공소가 길 왼쪽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박씨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친시누이올케 간으로 그 후손이 현재 평택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순례객은 여기서부터 순교선조들의 향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배티까지는 약2킬로미터 정도로걸어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길은 박해 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 통로 였는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은 믿음 하나로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 선조들의 가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이 묘소만이 남아 있다.

 

 

푯말이 서 있는 곳에서 안성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드디어 배티 사적지가 나온다. 성지로 오르는 산길 맨 앞에서 ''순교 현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았던 선조들의 굳은 정신이 단단한 비석을 통해 느껴진다.

 

왼쪽으로 사제관을 두고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당시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둥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 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공소 터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오솔길을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길가에 초소가 있고 오른쪽으로 집이 몇 채 보이는데 그 뒤가 바로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곳이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잤다는 최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 공과"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던 바로 그 공소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직 그 자리를 알려 주는 녹슨 푯말만이 옆으로 기울어진 채 남아 있어 후손들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고갯길을 따라 9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무명의 숨은 꽃''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 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순교자 묘가 안장되어 있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돼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배티 - 숨은 꽃들의 보금자리

 

고 윤의병(바오로) 신부의 [은화](隱花). 말 그대로 박해 시대에 피어난 숨은 꽃들의 신앙과 고난을 그린 군난 소설이다. 지금까지 이 작품만큼이나 오랫동안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그만큼 신자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는 소설은 없었다. 아울러 저자 신부가 6.25 전쟁으로 행방 불명됨으로써 미완성 작품으로 끝나게 된 점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배티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 중심지였다. 배티 일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이 골배나무가 많았다던 배티[梨峙](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와 그 일대의 교우촌들이다. 윤의병 신부가 태어난 곳은 배티 입구의 용진골(용덕리)이었고, 순교자들을 배출한 절골(용덕리), 동골(양백리), 발래기(명암리), 퉁점(명암리) 등도 배티 인근에 퍼져 있다. 특히 현재에도 옛 교우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삼박골은 배티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삼박골이 바로 [은화]의 주된 배경이었다. 또 그 남쪽 성거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서덕골(충남 목천군 송전리)은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성장한 곳이고, 그 이웃인 소학골(충남 북면 납안리)은 칼래(Calais, 姜) 신부의 피난처였다.

 

배티 성지를 가려면,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진천에서 빠져 나와 약 30분 정도를 다시 서쪽으로 달려 백곡면 소재지를 지난 뒤 북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된다. 지금은 경기도 안성에서 배나무 고개를 넘어 진천으로 가는 길이 잘 포장되어 있지만, 1970년대만 해도 배티로 가는 교통로는 방금 말한 ''진천 - 백곡로''를 이용하거나 충남 ''입장 - 백곡로''를 거쳐 가야만 했다.

 

이 일대에서 배티 인근만큼 깊은 산골짜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박해를 피해 새 터전을 찾아나선 충남, 경기, 충북의 신자들이 하나 둘 이 골짜기로 모여 들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우연히 서로가 신자임을 알게 되어 함께 비밀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산을 개간하여 오죽잖은 밭농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때로는 옹기나 숯을 구어 생활하였다. 그러면서도 새 신자들이 교우촌에 들어오면 서슴지 않고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인근에는 점차 교우촌이 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삼박골은 배나무 고갯길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집터나 돌담의 흔적, 우물터만이 겨우 남아 있지만, 마을 뒷편에는 유명한 신자인 이씨 집안의 순교자 무덤 2기가 있으며, 왼쪽 골짜기에는 유사시에 배티로 도망하던 신자들의 비밀 통로가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신자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다는 것이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터전을 잡은 이곳에서도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신앙 생활은 언제나 감추어진 상태였고, 교회 서적이나 성물도 충분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죽는 날까지 성사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자들은 1850년 초에 최양업 신부를 모시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 때 최 신부가 거처로 정한 곳이 바로 배티 이웃에 있는 동골 교우촌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있는 그의 친척집에는 셋째 아우인 최우정(바실리오)이 살고 있었다. 또 산너머에 있는 서덕골 교우촌의 백부 댁에는 둘째 아우가 있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6-127]

 

최양업 신부와 배티의 무명 순교자

 

최 신부는 이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거나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저술하였다.

 

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골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로 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서).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만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백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배티 일대는 이러한 최 신부의 신앙과 땀이 배어 있다는 두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의미는 순교자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곳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다. 특히 오반지(바오로)의 경우는 순교 후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무덤 소재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를 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와 삼박골,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7-129]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두 번째 한국인 신부. 세례명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

 

1. 생애 :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듬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는데, 틀림없이 이 곳 수리산에서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즈와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처럼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는(그간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보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2. 사목활동 : 귀국하자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를 두루 다니며, 그것도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간벽지만을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1년간 7천여리를 찾아다니며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그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워낙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이 넓고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어서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철종년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소위 사군난(私窘難)은 그칠 날이 없었다. 사군난은 그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으며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최 신부는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 앞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이같이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또한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최 신부 혼자만도 1,000여명의 예비자를 기록함으로써 개종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뜻밖에 1859년말에 박해가 일어났다[庚申迫害]. 이 박해로 인해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갇혀 지내야 하였다.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생신부들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순교까지 각오하였다.

 

그러나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최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개종운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충청도 鎭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에서 쓰러져 장티푸스로 보름만에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 집안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쇠고기에 체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아마 처음의 식중독이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활동 12년 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최 신부의 사망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한국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덕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손실이었다. 교구장을 위시하여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3. 저술활동 :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그 중 1통은 遺失]을 남겼다. 그는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사여구를 구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 작문 2통을 남겼다. 최 신부의 서한들은 최 신부 자신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필요불가결의 기본자료이고 또한 한국 근세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최 신부는 그의 부모의 순교사적을 위시하여 한국 순교자에 관한 증언과 자료도 수집했는데 다블뤼(Daveluy, 安敦尹) 보좌주교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했고, 달레(Dallet)는 그것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최 신부는 또한 ≪한국순교자전≫을 번역했는데 그 제목은 이러하다.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

 

최 신부는 또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교리문답의 출판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이었을 것이고, 주요 기도서도 번역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같은 해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였을 것이다.

 

최 신부는 또한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많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저자성(著者性)에 관해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연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4. 사상과 영성(靈性) : 그의 성성(聖性)은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의 찬사에서처럼 굳건한 신심, 드문 덕행, 구령(救靈)을 위한 불같은 열심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덕행 중에서 첫째로 그의 겸덕(謙德)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겸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순명을 기다리는 것이었고(이것은 그의 7여년에 걸친 입국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인(對人)관계에서는 인간을 인간의 존엄성에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의미하였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최 신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은 그의 12년간의 사목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 김대건 신부의 성성이 한마디로 피의 증거(순교)였다면 최신부의 일생은 땀의 증거(순교)였다.

 

최 신부의 선교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매우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해 마지않았다. 양반제도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교회 내에서는 분열을 초래하여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오고, 국가를 위해서는 인재등용에서 인권이 무시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선교사에 관해 최 신부는 그들이 사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속을 익혀야 할 것을 주장했고, 셋째로 한국적인 선교대책으로서 조속한 종교자유의 획득과 이를 위한 프랑스 정부측으로부터 조선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崔奭祐)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

모든 성인들의 덕행으로 찬미 받으시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당신은 일찍이 성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성인 성녀들을 공경하여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나이다.

박해의 상황에서 주를 위해 모든 생애를 바치신 착한 목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공로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저희로 하여금 그 가르친 바를 따르며, 더욱 신앙에 정진하게 하소서. 또한 최양업 신부의 공로로 저희를 환난 중에 보호하시며, 저희가 드리는 기도를 들어 허락하심으로써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저희가 소망하는 대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복자와 성인들 반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장(張) 토마스(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언제나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 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때에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代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송(宋) 베네딕토(1798-1867년)


송 베네딕토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베네딕토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네딕토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네딕토의 나이는 69세였다.

 

송(宋) 베드로(1821-1867년)


송 베드로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베네딕토를 모시면서 성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부친 베네딕토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베드로와 그의 부친 베네딕토,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46세였다.

 

이(李) 안나(1841-1867년)


이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宋)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토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송 씨 집안이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녀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이 안나와 그녀의 시댁 식구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안나의 시조부인 베네딕토를 비롯하여 그녀의 시아버지 송 베드로, 베드로의 딸,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안나의 나이는 26세였다.

 

오반지(吳盤池) 바오로(1813-1866년)

 

오반지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디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 나갔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으니, 이때가 3월 13일(음력 1월 27일)이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오반지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 마디만을 얻어내려고 갖가지로 유혹하였지만,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거한 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기 위해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처럼 바오로가 순교한 날은 1866년 3월 27일(음력 2월 11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 찾아가는 길

 

'[교회와 영성] > 성지(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원] 안성 죽산성지  (0) 2006.08.20
[청주교구] 감곡성당  (0) 2006.07.21
[원주] 배론  (0) 2006.03.27
[서울] 절두산  (0) 2006.03.27
[대구] 한티성지  (0) 2006.02.1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