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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월 19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1. 19.

가누토 4세(1.19)

신분 : 왕, 순교자

연대 : 1086년

지역 : 덴마크

 

   덴마크의 국왕 스웨닌 어스트릿슨(Sweyn Estrithson)의 아들이며,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크누드 왕의 조카인 성 카누투스(Canutus, 또는 카누토)는 1075년에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카누투스 4세로서 덴마크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의 로버트 백작의 동생인 아델라(Adela)와 결혼함으로써 성직자와 선교사들을 적극 지원하였고 또 많은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1085년에 영국 침공을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귀족들에 대한 무거운 세금이 그의 동생 올라프(Olaf)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그만두고 푸넨(Funen) 섬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는 여기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성 알바누스(Albanus) 성당에서 반란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순교자로 보았다. 그의 무덤에는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은 높이 평가받아 왔으므로 교황 파스칼 2세(Paschalis II)는 1101년 그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다. 그의 이름은 크누드(Knud)라고도 한다.

 

나탈란(1.19)

신분 : 주교

연대 : 678년

지역 : 애버딘

 

   성 나탈란은 스코틀랜드 북부 애버딘에서 태어난 귀족이었다. 그는 덕이 뛰어나 인간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높은 존경을 받았고, 교양 학과에도 정통하였으며 온전히 신적인 관상에 머물렀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는 손수 땅을 경작하였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그는 사탄과 멸망으로 치닫는 세속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진 위대한 성인이었다. 로마(Rome) 순례 중에 그는 그의 뛰어난 성덕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애버딘에 주교좌를 정하고 성당을 건립했으며, 이전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에 그의 모든 재산을 사용하였다. 그는 나탈라누스(Natalanus)로도 불린다.

 

레미지오(1.19)

신분 : 주교

연대 : 772년

지역 : 루앙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아들인 성 레미기우스(또는 레미지오)는 755년에 프랑스 루앙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프랑스 지역에 로마 전례와 성가를 도입하였다.

 

마르가리타(1.19)

 

신분 : 공주, 수녀

연대 : 1242-1270년

지역 : 항가리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조국 헝가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태어났는데, 그녀의 부모는 만일 전쟁이 승리한다면 어린 마르가리타를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 은혜는 실제적으로 허락되었기에 세 살 난 딸을 베스프렘(Veszprem)에 있는 도미니코 수녀원에 맡기게 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국왕 벨라 4세(Bela IV)와 마리아 라스카리스(Maria Laskaris)였다. 그녀는 12세 때에 첫서약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서약할 자격이 미달된다는 내용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정치적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성녀 마르가리타는 수녀원을 떠나기보다는 코와 입술을 자르라고 항변하여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임을 입증하였다.

   그 후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과 자기 극기는 여러 가지 활동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가끔 온밤을 지새우며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고, 기도의 효력을 확신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하였다. “갑자기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순 없지만, 어쨌든 하느님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다.” 사실 그녀의 이 말이 입증된 적이 있는데, 한 번은 2명의 수녀들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더 있다가 가라고 하였지만 즉시 떠나려 했을 때 그녀의 기도로 갑자기 비가 와서 그곳에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녀는 자주 탈혼하였고 기적도 많았다. 또 사순절이 끝날 무렵이 되면 그녀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식으로 인하여 측은한 생각마저 들 정도까지 되곤 하였다. “성 금요일은 하루 중에서 가장 짧은 날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270년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사망한 성녀 마르가리타는 1789년 시복된 후 1943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마르첼로 스피놀라(1.19) (복자)

신분 : 대주교

연대 : 1835-1906년

지역 : 세비야

 

  성 마르첼루스 스피놀라(Marcellus Spinola, 또는 마르첼로 스피놀라)는 1835년 1월 14일 에스파냐 카디즈(Cadiz) 교구의 산 페르난도(San Fernando) 섬에서 스피놀라의 후작 후안 스피놀라 이 오소르노(Juan Spinola y Osorn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라나다(Granada), 발렌시아(Valencia), 세비야 대학에서 수학한 후 1856년 민법과 교회법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의 헬바(Helva)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로서 활동하다가 성직에 입문하여 1864년 세비야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주교좌 성당 참사위원과 본당신부 등 다양한 사목활동을 하던 그는 1880년 12월 16일 세비야 교구의 보좌주교가 되었고, 이어 1884년 코리아(Coria)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성심의 종(the Order of Slaves of the Divine Heart)이라는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86년 말라가(Malaga)의 주교 그리고 에스파냐 왕국의 원로원 의원 등을 역임한 그는 1895년 12월 2일 세비야의 대주교가 되었다. 활발한 사목활동을 하던 그는 1906년 세비야에서 선종하여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1987년 3월 2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메살리나(1.19)

신분 : 순교자

연대 : 251년

지역 : 폴리뇨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5월 26일)의 제자인 성 펠리키아누스(Felicianus, 1월 24일)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교황 성 빅토르 1세(Victor I, 7월 28일)로부터 폴리뇨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팔리움(Pallium)을 받은 첫 번째 주교로 기록되었다. 그는 약 50년 동안 주교로서 봉직하다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었다.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물을 봉헌하라는 요구를 거절하면서부터 그는 심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한 뒤 폴리뇨 교외에서 순교하였다. 그 당시 성 펠리키아누스로부터 수도복을 받은 성녀 메살리나가 감옥에 갇힌 그를 찾아 극진히 돌보던 중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바시아노(1.19)

신분 : 주교

연대 : 413년

지역 : 로디

 

   시칠리아(Sicilia)에서 태어나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로디의 주교가 된 성 바시아누스(Bassianus, 또는 바시아노)는 그의 친구인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에게 높은 존경을 받았다. 성 바시아누스는 성 암브로시오와 함께 아퀼레이아(Aquileia) 공의회(381년)에 참석하였다.

 

바오로(1.19)

비아(1.19)

사투르니노(1.19)

수체소(1.19)

야누아리오(1.19)

율리오(1.19)

제론시오(1.19)

제르마나(1.19)

카토(1.19)

신분 : 순교자

연대 : 2세기

 

   성 바오로(Paulus), 성 게론티우스(Gerontiu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수케수스(Successus), 성 율리우스(Julius), 성 카투스(Catus), 성녀 비아(Pia), 성녀 게르마나(Germana)는 2세기에 누미디아(Numidia)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베아트릭스(1.19)

신분 : 수녀

연대 : 1216년

지역 : 랑스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 교구의 랑스에서 태어난 베아트릭스(Beatrix, 또는 베아트리체)는 벨기에의 몽스(Mons) 부근에 시토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수녀가 되었다.

 

불스타노(1.19)

신분 : 주교, 수도승

연대 : 1008-1095년

지역 ; 우스터

 

   울프스탄(Wulfstan)으로도 불리는 성 불스타누스(Wulstanus, 또는 불스타노)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워릭셔(Warwickshire)의 롱 이칭턴(Long-Itchington)에서 태어나 이브즈햄(Evesham)과 피터버러(Peterborough) 수도원에서 공부한 후 우스터(Worcester)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나 1062년에 우스터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지극히 단순하고 거룩했던 성 불스타누스는 웨스트민스터 시노드(Synod of Westminster)에서 주교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의 성덕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는 빌리암의 영국 침략 때에 주교좌를 지킨 유일한 주교로 높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노르만족(Norman)의 학정에 대하여 공적으로 반대하고 항의하였다. 그는 32년 동안이나 교구를 다스린 위대한 주교였다. 그는 120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브란발라도(1.19)

신분 : 주교

연대 : 6세기

지역 : 저지

 

   성 브란발라두스(또는 브란발라도)의 축일은 콘월(Cornwall) 지방에서는 2월 9일과 6월 6일에 기념하는데 오늘은 아마도 그의 유해를 이장한 날로 보인다. 그는 켈트(Celt) 또는 웨일즈(Wales)의 수도승으로 저지의 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의 많은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사실과 아닌 것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성 삼손(Sampson, 7월 28일)과 함께 콘월과 채널(Channel) 섬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까지 여행하였다.

 

안드레아(1.19)

신분 : 신부, 선교사

연대 : 1485년

지역 : 페쉬에라

 

   이탈리아 가르다(Garda) 호수가 페쉬에라의 그레고(Grego) 가문에서 태어난 안드레아(Andreas)는 어린 나이에 브레시아(Brescia)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피렌체(Firenze)의 유명한 산마르코(San Marco)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사제가 된 그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스위스와 북이탈리아 국경 지대인 바텔리나(Vatellina)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 지방은 이단이 득실거리고 또 주민들이 난폭하고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고난에 대한 뛰어난 신심과 겸손 그리고 청빈 정신으로 삭막한 주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바텔리나 지방에서만 45년을 선교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20년에 승인되었다.

 

알베르토(1.19)

신분 : 주교

연대 : 7세기경

지역 : 카쉘

 

   전승에 의하면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영국 사람으로 아일랜드, 특히 카쉘 근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그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그 후에 바이에른(Bayern)에서 성 에르하르두스(Erhardus, 1월 8일)와 함께 활동하였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난 그는 돌아오는 길에 독일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카쉘 교구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제르마니코(1.19)

 

신분 : 순교자

연대 : 155년?

지역 : 스미르나

 

   성 게르마니쿠스(또는 제르마니코)의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으나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가 기록한 “스미르나에 보낸 편지”에서 그의 순교 사실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귀족이었고 신앙 때문에 야수들의 밥이 되어 순교하였다. 또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의 저서인 “교회사”에서 성 게르마니쿠스의 영웅적인 순교를 기술하였다.

 

카텔로(1.19)

신분 : 주교

연대 : 9세기

지역 : 카스텔라마레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남부 카스텔라마레의 주교인 성 카텔루스(또는 카텔로)는 소렌토(Sorrento)의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2월 14일)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는 카스텔라마레의 주요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토마스(1.19)

 

신분 : 신부

연대 : 1655-1729년

지역 : 코리

 

   이탈리아 벨레트리(Velletri)의 코리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자비심 많은 어느 사제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왔고 또 로만 캄파니아(Roman Campania)에서 양치는 일에 오랫동안 종사해야만 하였다. 그는 양치는 동안에 친구들과 잡담하는 대신 혼자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을 관조하며 묵상하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기도와 관상하는 습관이 붙었다.

   양친을 잃은 뒤 성 토마스는 22세의 나이로 코리에 있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6년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항상 한적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관상생활에 몰두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허락을 받고 수비아코(Subiaco)와 인접한 치비텔라(Civitella)로 갔다.

   그가 한 번은 성당에서 성체를 영하던 중에 탈혼에 빠져들었는데 성합을 손에 든 채로 천장까지 떠올라 잠시 있다가 밑으로 내려와서 형제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준 적이 있었다. 또 그는 식탁에 놓인 빵을 모두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회원들이 식탁에서 빵을 모두 치우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만일 마음이 기도하지 않으면, 혀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 그는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된 후 1999년 11월 2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폰시아노(1.19)

신분 : 순교자

연대 : 169년

지역 : 스폴레토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또는 폰시아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이탈리아 중부 스폴레토에서 고난을 겪고 순교하였다.

 

헨리코(1.19)

신분 : 주교, 순교자

연대 : 1156년

지역 : 웁살라

 

   로마(Rome)에 살던 영국 태생의 성 헨리쿠스(Henricus, 또는 헨리코)는 후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Hadrianus IV)가 된 교황대사인 니콜라우스(Nicolaus) 추기경을 수행하여 1151년에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로 갔다가 다음 해에 스웨덴 웁살라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핀란드(Finland) 사람들이 웁살라를 침략했을 때, 스웨덴의 국왕 성 에리쿠스(Ericus)와 함께 그들을 격퇴하였다. 그 후 헨리쿠스는 핀란드이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랄리(Lalli)라고 부르는 어느 개종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의 사도’로 불리며, 핀란드의 수호성인으로 1158년에 시성되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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