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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교리

사도 바오로의 생애

by 세포네 2005. 8. 30.

사도 바울로의 생애


                    정양모신부님의 저서에서 발췌

 

 

Ⅰ.머리말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평소에 대체로 팔레스티나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분의 비극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고 나서 예루살렘에 창립된 원시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유다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적 종교인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개혁운동이라 하겠다.
  그러다가 서기 36년경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 인들의 대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했다.  (사도 11, 19-21)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라 하겠다. 물론 그 전에 필립보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한 일이 있고(사도8, 26-40), 베드로가 가이사리아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10, 34-38),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에 불과하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공은 아무래도 바르나바와 바울로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만 일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 일을 돌본 다음(11, 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다.


  특히 바울로는 세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했다.(사도13,1~21, 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로야말로 기독교의 창시자라는 주장을 하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는 물론 과장된 표현이지만, 바울로가 예수님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틀림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을 꾸린 철저한 그리스도 인이요, 지중해 곳곳에 주 예수님을 널리 선전한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였다.


  바울로의 생애를 엮자면 우선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을 참고해야 한다.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따르는 신약학계에서는 데살로니카 전서, 고린토 전후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필립비서와 필레몬서 등 7편을 친서로 간주한다.


 그 밖에도 바울로가 썼다는 편지가 6편이 있으나. 이것들은 바울로가 손수 쓴 편지들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존경한 후학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펴낸 작품들이라는 게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곧 데살로니카 후서,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 디모테오 전후서와 디도서는 위서라는 것이다. 이 여섯 작품들이 비록 위서들이기는 하지만 바울로의 사상을 계승한 것들이니 만큼 사료 가치가 친서들보다는 떨어지지만 사도의 영향을 밝히려면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료로서 사도행전을 꼽는다. 사도행전 9장과 13 ~28장에서는 바울로의 개종과 활약상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필자는 바울로를 상면한 적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에 관해 수집한 정보 가운데는 오보도 더러 있었다. 특히 그는 바울로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서 묘사했다.(가톨릭 대사전 532-534 쪽 ‘사도행전’을 보라).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바울로의 친서에서 바울로의 사건을 다루면서 같은 사건을 상반되게 서술한 경우에는 사도행전을 제쳐놓고 바울로 자신의 증언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바울로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알리는 데 전심 전력한 까닭에 (2고린 4,5) 그의 친서들에 따라 그의 생애를 엮기는 지극히 어렵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가는 사도행전 9장과 13-28장에서 바울로의 활약상을 일관된 이야기로 꾸며 놓은 까닭에 사도행전에 따라 바울로의 활약상을 서술하기란 비교적 쉬운 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로의 생애를 서술함에 있어 흔히 사도행전을 많이 따르게 된다. 사도행전이 사료로써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편의상 말려드는 셈이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사료 평가에 능통한 후학이 나와서 이 글의 미숙한 점들을 바로잡아 주기 바랄 뿐이다.
  바울로에 관한 사료들을 포괄적으로 참조하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제법 자세히 밝힐 수 있다. 물론 완벽하게 구명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이 바울로이다.
 
Ⅱ.전기적 요소


 1.출생 연도
  기원 36년경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맨 처음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사도 7, 58)그리고 55년경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로는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1,9)
 바울로의 출생 연도 또는 나이를 가늠케 하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 및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울로의 출생 연도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기원 5-10년 사이에 출생했으리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역시 막연한 추정에 불과하다.

 

2. 출생지
  바울로는 다르소에서 태어났다.(사도 9,11: 21,29: 22,3) 다르소는 지중해로 흐르는 치드노스 강 양편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현재 주민은 4만명 남짓하지만 옛날에는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치드노스 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할 뻔했다고 한다. 대왕 사후에 다르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례로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인들이 여기서 활약했던 것이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아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다르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 와서 정착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바울로는 자연스레 헬라 어와 셈족 어, 헬라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현재 다르소에는 바울로 시대의 유적이 거의 없다.


 3. 가족
  바울로는 자신의 출생, 할례, 성장, 처신 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보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로 처신했다. 또한 예루살렘에는 생질이 살고 있었다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에서 자신의 처지를 “독신”이라고 했다. 이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고, 결혼했지만 상처했거나 별거중이라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필립비 3, 5-6 : “나는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히브리 족에서 나온 히브리 인이요 율법에 의한 올바름에 있어서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로마 11,1 : “나만해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에 속합니다.”
●사도22,3 : “나는 유다인입니다.나기는 길리기아의 다르소에서 났지만 바로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므리엘 선생 아래서 우리의 조상이 전해 준 율법에 대해서 업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도23,16 : 그런데 바오로의 생질이 그들의 음모를 전해 듣고 병영으로 ~
●사도 22, 25 : 그래서 군인들이 바울로를 결박하자 바울로는 거기에 서 백인 대장에게 “로마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 있소?”하고 항의하였다.
●1고린7,8 : 결혼하지않은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1고린:9,5 :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4. 이름
  바울로는 친서에서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바울로’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7, 58과14, 7에서는 ‘사울로’라고만 하다가. 13, 9에서는 ‘사울로, 일명 바울로’라고 동일시한 다음, 13, 13과28,25에서는 ‘바울로’라고만 한다.
 그런가하면 세차례 나오는 사도행전 바울로의 개심기에서는 그를 일컬어 ‘사울’이라고 한다.(9,4.17: 22,7.13:26,14)
 알다시피 이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울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사울로’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로는 로마·그리스도식 이름이다. 우리 주인공은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 그리고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산 까닭에 ‘사울(로)’ 과 ‘바울로’ 두 가지 이름을 지녔던 것이다.

 

5. 직업
  바울로는 전도할 때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다. 성격적으로 신도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수입을 노려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던 것이다.
 1데살 2, 9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


 1고린 9,15
 내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이 긍지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2고린 2, 17:11, 7.20:12, 16 참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했는지 바울로 자신은 한번도 밝히지 않는다.
 다행히 사도행전 18장 3절에 그의 직업이 명시되어 있다. 즉,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51-52년경 그가 고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유대인 부부와 함께 천막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부부로 말할 것 같으면 49-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관계로 고린토로 쫓겨와서 임시로 눌러 살다가 바울로의 전도에 큰 도움을 준 유대 계 그리스도 인들이었다.


 바울로는 이처럼 교우들의 신세를 지기 싫어했지만, 필립비 교우들이 주는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바울로의 무사무욕한 본심을 그들만은 늘 믿었기 때문이다.(필립 4,16~18: 2고린 11,9)


6. 건강
 개심 전의 건강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지중해 각지에서 전도할 무렵에 만성적인 지병을 앓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본디 웬만해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하기를 꺼리고 주 예수님을 선포하는 데 전력 투구한 사도인지라 자신의 병명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고질병에 시달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갈라 4, 13-14절
 여러분이 아시는바와 같이 전에 내가 병을 앓았던 것이 기회가 되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체 조건이 여러분에게는 괴로운 짐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나를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천사와도 같이, 또 그리스도 예수와도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50년 경 제 2차 전도 여행 때 바울로는 오늘날의 터키 중부에 위치한 갈라디아 지방을 그냥 통과할 작정이었으나 뜻밖에 발병하여 한동안 머무르게 되었고 그 기회에 그 지방에 여러 교회를 창설했다는 말씀이다.
 2고린 후서 12, 7~9절 :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울로는 43년경에 몰아경에서 계시
의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부터 그는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갈라디아 지방 교우들이 변절하여 자기에게 큰 심려를 끼치자 바울로는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마무리한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6,17).
 바울로가 설립한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 말썽을 가장 많이 피운 고린토 교회의 교우들이 그를 깔볼 만큼 ”현존하는 몸은 약했다.“(2고린 10, 10 ”참조 1 고린 2,3)

 

7. 성격과 언변
 바울로는 명상에 잠겨 사는 신비가가 아니었다. 그 무엇을 깨달으면 곧 행동으로 옮기는 투사형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유대교를 신봉하는데도 남달리 철저했고, 한번 개심한 다음 예수님을 선전하는데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정열이 넘치는 사람이요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신약시대에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은 알랙산드리아 출신 유대계 그리스도인 아폴로였다.(사도 18,24~28)
 고린토 신도들은 아폴로의 설교에 열광한 나머지 아폴로 당파를 만들 지경이었다.(1고린1,12: 3,4~6)
 아폴로와는 달리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2고린10,10) 그리고 바울로 자신도 눌변을 시인했다.(2고린11,6)
 그의 필력을 살펴보자. 바울로에 대해 비판적인 고린토 교우들 조차도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 평했다.(2고린10,10)
 사실 바울로의 편지는 신앙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열적인 성격의 산물이지 수사학적인 논리나 기교를 부리지 않은 까닭에 전반적인 짜임새가 부족할뿐더러 앞 뒤 문맥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기에 125년경에 씌여진 베드로 후서에서는 바울로의 편지들 가운데는 난해한 곳이 있다고 한다.
“바울로의 편지들 가운데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함으로써 파멸을 불러 들이고 있습니다.(2베드3,16)

 바울로가 에페소 감옥에서 필립비교우들 및 골로사이교우들과 교우 필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는 별 수없이 손수 썼겠지만 다른 경우에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대필 시켰다.(갈라6,11: 1고린16,21: 로마1622)
2데살3,17: 골로4,18)
"이렇게 친필로 서명을 하며 ……"

 

8. 성장 배경
 바울로가 자라면서 받은 영향을 대별하면 세 가지이다.
①유대 종교 배경]
 바울로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다.(필립 3,5: 갈라 1,14).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단체인 바리사이 파에 가입했다.(필립 3,5: 사도 23, 6:26, 5).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깊이 연구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당대의 석학 가믈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23,3)
②그리스 문화 배경
 바울로는 다혈질적인 사람이라 그리스 견유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 애용한 대인논법(그리스어로는 “디아트리베”)을 즐겨 썼다(갈라 5-6장: 1고린 9자: 로마 2,9.12-15). 이 논법은 적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상하고 적수의 반론에 맞서 그를 이인칭으로 부르면서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맹공을 가하는 논법이다.
 그리고 바울로가 사용한 낱말들을 살펴보면 히브리-아람 어에는 없는 그리스 낱말들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자유, 양심, 자연, 덕, 의무, 시민권, 입양, 이성 등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운동경기를 하지 않은 데 반해 그리스인들은 운동을 무척 즐겼다. 바울로는 그리스 경기 종목에 속하는 경주와 권투의 예를 들곤 하였다(1고린 9, 24-27: 필립 2,16:3, 13-14).
 ③ 로마 정치 배경
 태생 로마 시민인 바울로는  시민권에 따르는 특전을 누렸다. 로마 시민은 태형을 면했다. 따라서 바울로는 필립비에서 매질을 당하고 나서(사도 16,37) 또는 예루살렘에서 매질을 당할 위험에 처하자(22,25) 자신의 시민권을 내세워 항의했다. 또한 로마 시민이 지방 관청의 재판을 불신하는 경우에는 로마 황제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60년 가을 페스도 총독이 바울로를 유대 최고의회에 넘겨주려 하자 바울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다.(사도 25,6-12).또한 로마 시민은 극형을 받을 때도 십자가형과 맹수형만은 면했다. 사도 바울로는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한 듯한데 그 때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십자가형과 맹수형만은 면했을 것이다.
 이처럼 바울로는 로마제국의 혜택을 톡톡히 입었다. 그가 제국에 대해서 비판적이기보다는 호의적인 발언을 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도무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던 그가 58년 초(봄) 고린토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처럼 로마제국의 정권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일방적으로 친정부적인 입장을 취했다.(로마 13,1-7).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무모하게 정권에 도전하려는 이들이 있어 교회와 정권간의 마찰을 염려한 나머지 친정부적인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로가 제국의 혜택을 남달리 입을 것도 더불어 작용했을 법하다.

 

9. 교회 박해
 바리사이요 율사 후보생인 바울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율법 실천과 연학에 몰두하였다.(갈라 1, 13-14 : 필립 3,5-6)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심히 비판한 예수(마태 5,17~48)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13)이지 절대로 메시아일 수 없다고 바울로는 확신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기독교도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적인 바울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 섰다.(갈라 1,13. 23: 1고린 15,9:필립 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 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해외 유대 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했고(7,58-8,1)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출장 가기도 했다.
(9,1-19: 22,3-21: 26,9-18).


10. 개심
 34년 또는 36년경 바울로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에 갑자기 개심하였다. 그의 신관이야 변할 리 만무했겠지만 기독관이 돌변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순간에 달라졌던 것이다. 개심이야말로 바울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상 이야기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전심 전력한 사도인지라(2고린 4,5), 그 중차대한 개심 사건조차 그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 또는 암시할 뿐이다. 그 자신의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
․1갈라 1, 15-16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
 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 주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
 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
 습니다.”
․1고린 9, 1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입니 까?”
․1고린 15, 8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동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필립 3, 12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 것입니다.”

․고린토 후서 4장 6절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
 느님께서는 친히 우리 마음속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11. 개심에서부터 1차 전도여행 직전까지  (38~45년경)

 바울로는 개심한 다음 주로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노선을 따랐다.
 곧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노선을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유대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였다.
 그는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개심한 다음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레를 받고(22,16)설교했다고 한다.(9,20~22)
 그 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곧장 아라비아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3년 후에 나는 게파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갈라1,17~18)
  아라비아(=나바테아 왕국)로 간 목적은 그 곳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전도는 고사하고 나바테아인들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커스로 피신한 것 같고, 그들이 다마스커스까지 와서 바울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서 극적으로 탈출,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동안 게파(베드로)와 함께 지냈다. 극적인 탈출 사건에 관해서는 바울로 자신이 기록을 남겼다.
 “다마스커스에서는 아레다 왕의 총독이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커스 사람들의 도성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광주리에 담겨 성벽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려져서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습니다.(2고린 11,32~33 ; 참조 사도 9, 23~25).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 및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나 보고 나서 바울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39~43년경?) 전도했다.(갈라 1, 19~24 : 참조 사도 9,30;11, 25)
  그 무렵,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대 인들에게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혼성 교회를 창립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 보조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울로를 초빙하여 만 일년 동안(43~44년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다.
 이런 사실은 바울로의 서간에는 전해 오지 않고 오직 사도행전 11장 19~26절에만 적혀 있으나 그 신빙성을 부정할 까닭이 없다.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대도시였다. 로마제국에서 백만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지방 수도로서 5십만 시민이 살았으며 로마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요즘 발음이 조금 바뀌어 안타키아라고 하며 주민은 7십만 명쯤 된다. 바울로 시대의 유적은 불행히도 전해 오지 않는다. 근교에는 베드로 동굴 성당이 있지만. 바울로 시대에 안티오키아 교우들이 여기에 숨어서 성찬을 집전한 것은 아니고 십자군들이 그런 전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안티오키아의 교회사적 중요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①본디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르넬리오 가족에게 전도한 적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 현상이었다.(사도10장).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유대계 그리스도 인들 중 일부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사상 처음으로 공공연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11,20). 그 결과 안티오키아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혼성 교회가 생겨났다.
  ②바울로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안티오키아에서 지중해까지는 80리. 오론토스 강 하구에는 셀류기아 피에리아 항구가 있는데(13,4), 바울로가 바다로 여행할 때면 그 항구를 이용하곤 하였다.
  ③안티오키아 시민들이 예수님을 신봉하는 교도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 인들이라고 불렀다.(11,26)
  ④ 사도 교부 이냐시오가 여기서 주교로 재직하다가 110년경 로마에서 순교했다. 4세기에는 로마와 알렌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총주교좌가 되었다.

 

12. 1차 전도 여행(45~49년경)
1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행전 13~14장에 있다. 전도사들은 바르나바, 그의 사촌(골로 4,10) 요한 마르코, 그리고 바울로. 그들은 셀류지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 땅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바포에서 전도하였다.
  바포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지역 베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그만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14,13)
 베르게에는 헬라-로마 시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1만 5천 명을 수용하는 극장, 1만 2천 명이 구경할 수 있는 경기장, 공중 목욕탕, 헬라 성문, 로마 성문, 시장, 주랑 대로 등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베르게에서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터키 중부지역으로 가다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13, 14).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많은 유적을 미시간 대학교 발굴 팀이 발굴했는데 그 중에서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볼 만하다. 사도행전 13장 14~52절에 따르면, 전도사들은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했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대 인들은 불신할뿐더러 전도사들을 추방해서 전도사들은 이고니온으로 갔다.
  이고니온은 오늘날에는 코니아라고 하며 현재 주민수는 약2백만명. 바울로 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코니아는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가 활약한 덕분에 신비주의 성지가 되었고 12~13세기에는 강력한 셀주크 술탄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유적들은 대부분 그 때의 것들이다.
  이고니온에 이어 리스트라에서 전도했다. 바울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주에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 주자, 주민들은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울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하였다.(14,8~18) 리스트라는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로의 애제자가 된 디모테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 계 그리스도 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헬라 인이었다.(16, 1~2)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14, 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거꾸로 가면서 보살피고 나서, 아딸리아 항구에서 전도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 행 배를 탔다.(14, 25~26) 아딸리아는 오늘날엔 안딸리아로 이름이 조금 바뀌었다. 주민수는 9십만 명, 기후와 물이 좋아 이름난 휴양지다. 로마 황제 하드리안(117~138년 제위)의 순시를 기념해서 세운 하드리안 성문이 보존되어 있다. 반원형으로 된 출입구가 셋이 있는 성문이다.
하드리안 성문

 

13.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경)
 1차 전도 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 신앙만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에 상주하던 토박이 유대 계 사도들과 지중해 동부 여러 곳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해외 유대 계 사도들인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했다.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세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① 이방계 그리스도 인들은 유대교   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이 결의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로   부터 명실공히 독립하게 되었다.
  ②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울로와 바    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한다.
  ③ 예루살렘 모교회의 가난한자들을   위해서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편다
 ●갈라 2, 1~10 : 그 후 십사 년 만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디도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방인들 사이에 전하고 있는 복음을 그들에게 해명하였고 ~(중략)~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디도조차, 그가 헬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중략) -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 위한 복음을 위임 받았)듯이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였습니다. 할례(받은 사람들)의 사도직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힘을 주신 분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내게도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기둥처럼 존경받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은 내게 베풀어진 은총을 알아보고 친교의 (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주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가고, 저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1고린 16,1~4 : 주간 첫날마다 여러분은 각자 형편이 닿는 대로 저축할 수 있는 것을 자기 집에다 따로 놓아두시오. 내가 도착하면 여러분이 인정하는 이들을 내가 편지와 함께 보내어 여러분의 성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하겠습니다.
●2고린 8~9장 ;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모금 ●로마 15, 25~28 : 지금은 성도들에게 심부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인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얼마큼이라도 이바지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결정하였는데 사실 그들은 저들에게 빚진 이들입니다. 과연 이방민족들이 저들의 영적 은혜를 한몫 나누어 받았다면 그들도 물질적으로 저들에게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29절에도 사도회의에 관한 기록이 전해 오는데, 그 결정사항들이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회의에 참석한 바울로의 발언(갈라 2, 1~10)이 더 신빙성이 있다.

 

 14.안티오키아 사건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고 나서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다.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요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을 갖곤 하였다. 곧,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두 부류의 신도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게 봐서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례를 집전하였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자기네 교회 총책임자인 베드로가,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으니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 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그의 비행을 나무라자 그만 베드로는 겁을 먹은 나머지,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대 계 그리스도 인들도, 마침내 바르나바조차 이방인 그리스도 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베드로 때문에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로는 분연히 일어나서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었다. 곧,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선 안 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는 사도회의 규정에 따라 바울로는 교회 일치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갈라 2, 11~14 :  그러나 게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에 나는 그에게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상 야고보의 측근 몇 사람이 오기 전까지, 그는 이방인들과 더불어 (음식을) 함께 먹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자 그는 할례 출신의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리를) 피하여 교제를 끊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거짓으로 행동하였고 마침내는 바르나바조차 그들의 위선에 함께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맞추어 바른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게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인 풍속대로 살지 않고 이방인 풍속대로 살면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소?”


15. 2차 전도 여행(50~52년경)
 2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행전 15장 36절~18장 22절에 있다.
 ①전도사들은 양분되어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갔고, 바울로와 예루살렘 출신 유대 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시민인 실라 는 이미 일차 전도한 바 있는 터키 남부지역을 다시 찾아갔다.(15,22.32.40;16,37)
 ②바울로는 남부 지역의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를 제자로 삼았다.(16,1~3)
 ③이어서 당시의 갈라디아 지방, 오늘날의 터키 수도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에 갑자기 발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 교회들을 창립하였다.(갈라 4,13~15;사도 16,6)
 ④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16,8~10;20, 6~12)
 ⑤밤에 계시를 받고서 에게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 폴리스(=오늘날의 휴양도시 카발라)에 닿았다. (16,6~11) 그리고 나서 바울로는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고린토 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⑥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km 내륙으로 들어가서 필립비에서 전도했다.


 필립비 전도에 관해서 사도행전 16장

13~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안식일에 우리는 성문 밖,(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강가로 나갔다. 루리는 앉아서 모여든 부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리디아라는 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고을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부인이었다. 그가 (우리의 말을) 새겨들었으니,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로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셨던 것이다. 리디아와 그의 집안은 세례를 받고 나서 청하기를 ‘제가 주님을 믿는다고 판단하시거든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하면서 우리에게 강요하다시피 권하였다.
 필립비 교회야말로 바울로가 구라파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다. 필립비 교회는 바울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한 유일무이한 교회다. 필립비 전도 말기에 바울로는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귀신을 떼어 준 관계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킨다. 나중에 제 3차 전도 여행 중(53~58년경) 에페소에서 무려 27개월간 머물렀는데 한때 바울로는 신앙 때문에 에페소 주둔 로마군 부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 필립비 교우들로부터 물심 양면의 도움을 받고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필립비서다.


 기원전 42년 필립비에서 로마 공화국의 운명이 판가름났다.
 율리우스 케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씨우스의 로마군, 그리고 케사르 편을 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로마군이 대회전을 벌여 후자가 승리한 곳이 바로 필립비이다. 그 후 승자들끼리 로마 공화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다스리다가. 기원전 31년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쳐 대권을 통합하고 기원전 29년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BC29~14년 재위)


 바울로 시대에 필립비에는 주로 로마인들이 살았다. 기원전 42년 대회전 다음에 제대한 로마군 퇴역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 로마 시대의 유적으로는 아크로폴리스 산비탈 아래에 극장, 에냐시오 국도, 광장 등이 남아 있다. 바울로가 갇혔다는 작은 감옥은 있으나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⑦필립비를 떠나 바울로는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로 가서 전도했다.
 바울로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제법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는 바람에 바울로 일행은 올림퍼스 산중에 있는 75km 떨어진 베레아(오늘날엔 베리아) 마을로 피신했다.(17, 1~10: 1데살 2, 13~16)
 바울로는 베레아와 아테네를 거쳐 고린토에서 전도할 무렵에 데살로니카 교회로 편지를 보냈으니, 이것이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바울로는 이 서간에서 예수 부활과 예수 재림을 강조했다.
 예수님 개인의 경우에는 부활이라는 종말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그분이 미구에 재림할 때면 그리스도 인들도 부활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유대인, 이방인의 차별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날 데살로니카와 그 주변의 주민수는 56만명이다. 데살로니카는 수도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 항구로서는 가장 큰 도시다. 바울로 시대 유적으로는 소개할 만한 것이 없다. 후대의 유적으로는 도심에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있다. 이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샤 군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이다.
 ⑧바울로가 베레아 마을에서 전도하는데 데살로니카 유대인들이 들이닥쳐 훼방하는 바람에, 바울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 두고 홀로 아테네로 갔다.(17, 10~15)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몰락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수준급이던 아테네에서 바울로의 설교는 거의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전도 실패담이 사도행전 17장 16~34절에 적혀 있다.
⑨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교회 형편을 알아보고 싶기도하고 또한 그곳 교우들을 재교육하고 싶기도해서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보내고(1데살 3, 1~5), 바울로 자신은 실라를 데리고 고린토로 내려갔다.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km 떨어진 고린토로 가서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제법 큰 교회를 세웠다.(18, 1~17)
 고린토는 그리스 남부지역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북쪽에는 레카이온 항구를, 동쪽에는 겐크레아 항구를 끼고 있어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자연히 풍기는 문란했다. 고린토 뒷산 위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여신전 주변에는 이른바 성스러운 창녀들이 1천여 명이나 득실거렸다고 한다.
 49~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 인들을 추방한 일이 있었다.(수에토니우스, 글라우디오의 생애 25항) 그때 로마의 유대 계 그리스도 인 부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가 로마에서 고린토로 옮겨와서 살며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했는데, 바울로는 이 들 부부와 함께 살면서 같은 일을 하였다. 그리고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내려와서
데살로니카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울로는 데살로니카로 편지를 써 보냈으니,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는 바울로의 편지들 중에서 첫 번째 편지일 뿐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제일 먼저 씌어진 작품이다.
 고린토 전도 말엽에는 유대인들이 바울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18, 12~17)
 고린토 유적지에 가 보면 레카이온 중앙통 끝에 총독이 연설하고 재판한 법정 축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했다. 바울로 역시 같은 때에 고린토에 체류했다. 이것이 바울로의 연표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연대이다. 사도 바울로는 겐크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가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1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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