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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저는 믿나이다

(12) 박해가 시작되다

by 세포네 2025. 1. 26.

그리스도 신앙이 급속히 퍼지자 교회 박해 일어나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급속히 전파되자 유다인 지배층인 사제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그리고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임금이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 작 ‘성 야고보의 순교’, 유화, 1640년,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두 차례에 걸쳐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성사, 그리고 은사를 공유했고, 재산을 공동 소유했으며 사랑을 함께 실천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급속히 전파되자 교회를 경계하고 그리스도인을 적대시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유다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사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이들이고, 성전 경비대장은 말 그대로 성전 경비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로 대사제 다음 가는 사제가 그 직책을 맡았습니다.

사두가이파는 헬레니즘에 개방적인 귀족층의 유다인들로 사제 가문과 부유한 상인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 오경에 분명히 포함되지 않은 교의들을 부정하고,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죽은 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 세 무리 곧 성전과 관련된 유다교 사제 집단이 예루살렘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하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겼기 때문입니다.(사도 4,2 참조)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이튿날 유다교 최고 통치기구인 ‘산헤드린’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자리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습니다.(사도 4,5-6 참조) 한나스는 서기 6~15년, 카야파는 한나스의 사위로 18년부터 36년까지 대사제직을 수행했습니다. 한나스는 로마 당국에 의해 대사제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카야파는 예수님의 재판과 처형에 직접 관여한 인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산헤드린에서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산헤드린 의원들은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두 사도를 풀어줍니다.(사도 4,14-18 참조)

하지만 얼마 안 가 모든 사도가 체포됩니다. 사도들이 산헤드린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대사제 카야파가 주동이 되어 사두가이파를 움직여 사도들을 체포해 공영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산헤드린으로 끌려간 사도들은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온 백성에게 존경받던 율법 교사 가말리엘의 변호로 매질만 당한 채 풀려났습니다. 물론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사도 5장 참조)

그런데 왜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변호했을까요?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그는 바리사이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마케도니아인들에게 항거하던 하시드인들을 계승한 자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구전 전승을 열심히 준수하던 율법학자들로 중산층에 속했으며 백성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두가이파와 달리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에게 적대자는 율법과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한 예수님과 그들의 제자들이 아니라 로마인과 율법과 전통을 어기는 모든 이였습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옵니다. 바리사이였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몇이 나서서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민족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사도들에게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열리게 되죠.(15,5-6 참조)

마침내 공권력이 교회 박해에 가세했습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요한 사도의 형 야고보 사도를 칼로 쳐죽이고 베드로 사도를 잡아들입니다.(사도 12,1-11)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여한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루카 23,6-12 참조)의 조카로 서기 41년에 로마 총독이 통치하던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임금이 됩니다. 그는 단순히 유다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교회를 박해하고 야고보 사도를 참수하였습니다.

요한 사도의 형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와 구별해 ‘대(大) 야고보’라고도 합니다. 그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주인공인 바로 그 야고보 사도입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44년 4월에 죽었기에 학자들은 야고보 사도가 44년 초 또는 42~43년에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야고보 사도를 처형한 것에 대해 유다인들이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자 베드로 사도를 잡아들여 무교절, 곧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처형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명씩 4개 조를 짜서 베드로가 갇힌 감옥을 밤낮없이 지키게 했죠.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우들의 간구가 하느님께 전해졌는지 처형 전날 밤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옵니다. 탈옥한 베드로 사도는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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