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는 행정에 간여하지 않고, 지방관은 신앙행위 침해 말라”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
조선 지방국장, 1899년 3월 ‘교민조약’ 제시
박해시기 조선 정부로부터 오해를 받아온 천주교가 용인되기까지 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울 밖에서 주로 벌어졌던 교안(敎案)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프랑스 정부는 일종의 ‘약정(約定, 약속하여 정함)’을 맺었다.
1895년 고종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와의 만남에서 천주교 박해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지역마다 갈등이 일어났다.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초까지는 관리와 비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권리와 재산을 침해하는 양상이 많았던 반면, 1890년대 후반부터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사건 발생의 주체가 되는 사례가 많은 편이었다. 이는 개항기 이후 선교사들의 위상이 점차 더 높아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먼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약정’ 가운데 1899년에 맺어진 ‘교민조약(敎民條約)’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3월 10일 조선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가 뮈텔 주교를 방문해 교민조약을 제시했다. 조약 내용을 보면 천주교의 십계(十誡)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서교(西敎)의 본뜻은 올바른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신자들이 저지르는 폐해는 그 뜻을 어기는 것’이라며 갈등이 빚어질 때 서로 의논하여 해결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총 9개 조항 중 2조는 다음과 같다.
‘제2조, 선교사는 행정에 간여하지 못하고, 행정관은 선교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 조약의 대전제는 갈등을 공정하게 중재하기 위해 서로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만일 천주교인이나 일반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면, 지방국장에게 호소해 각 군(郡)에서 공정하게 심판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교와 지방국장이 각각 공사와 대신에게 알림으로써 일이 공정하게 해결되도록 하는 조항을 뒀다.
조선 지방국장이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은 무엇보다 조선 내부에서 신자와 비신자들로 인해 생긴 작은 갈등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사전에 천주교회와 합의하고 중재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맺어졌다는 명확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시기 교안이 발생할 때 이러한 ‘약정’에 준해 서로 협의해 해결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났다.
교민화의약정(뮈텔문서 제주-143). 제주교안 이후 조선 정부와 천주교회 사이에 맺고자 했던 협의안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
1901년 제주교안 이후 ‘교민화의약정’ 협의
두 번째 약정은 1901년 제주교안(신축교안)이 발생한 이후에 맺어진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이다. 제주교안은 천주교회와 토착세력 간의 몰이해와 갈등, 일부 신자들의 교폐와 조선 정부의 조세 수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간 징세인 역할을 했던 신자들의 행위로 큰 학살이 촉발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해결하고 훗날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약정을 맺었다.
총 12조로 구성된 이 약정은 1·2조에 서교(西敎)를 조정에서 금하지 않으며 입교 여부는 백성 자신의 원의(原意)에 의한 것임을 명시하고, 신자와 비신자가 서로 작폐(作弊, 폐단을 일으킴)하는 것을 금하도록 규정했다. 선교사는 정부의 민·형사 소송에 관여하지 못하며 폐해를 일으킨 신자들을 비호하지 말도록, 지방관들이 신자들의 교폐(敎弊)를 징치(懲治, 징계하여 다스림)하도록 규정했다.
이 약정은 제주교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제주 지역에 국한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이 약정 역시 조선 정부와 천주교회 사이 정식으로 맺어진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나, 수도 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천주교를 용인한다는 대목이 명시적으로 들어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출처=한국어 위키백과 |
1904년 ‘교민범법단속조례’ 협상 중 철회
천주교 신앙의 자유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은 ‘교민범법단속조례(敎民犯法團束條例)’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지만, 지방에서는 계속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1904년 6월 3일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은 프랑스 공사 서리 퐁트네(V. de Fontenay, 馮道來)에게 교민범법단속조례를 보내 협정을 제안하였다. 중요 대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선교사는 반드시 호조(護照)를 휴대하고 지방관은 합당한 보호를 해준다. 교민(敎民) 중 본국인이 남에게 고발당하거나 법률을 어겼을 때는 응당 본국 관원이 심사하되 공평히 판결하여 비호하지 않는다. 작폐한 신자를 조선 관리에게 내주어 처벌하도록 한다. 프랑스 선교사가 한국 민·형사 소송에 일체 간여하지 말되 교회의 일에 관해 불복하는 것이 있으면 프랑스 공사에게 항소, 한국 외부와 교섭해 타당하게 처리한다 등이다.
이와 같은 협약 사항은 1904년 6월 6일 자 ‘제국신문’ 기사로 보도되었는데, ‘단속조례’와는 그 내용에서 차이가 난다. 곧 신문 기사의 선교조약에는 ‘선교할 때 인민에게 억지로 권유하지 못하고’, ‘프랑스 선교사가 한국 내지에서 토지와 가옥을 매입하고 건축할 수 있다’고 나온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제시한 단속조례에는 그러한 대목이 없었다. 조선 정부는 오히려 이 조약을 통해 ‘법을 어긴 천주교 신자들을 단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단속조례 역시 협상 과정에서 철회돼 채택되지 못했다. 조선에서 외국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한 조치는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統監府)가 ‘토지가옥증명규칙’(1906)을 시행할 때부터였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 신앙의 자유 보장
조선 정부가 한불조약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규칙과 조약을 제안한 것은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들 사이 촉발된 교안(敎案)의 해결을 위한 고심에서였다. 그 중심 내용은 선교사들이 교폐(敎弊)를 저지르는 신자들을 비호하지 말고, 지방관은 선교사와 신자들의 신앙 행위를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 조약은 공식적으로 맺어지지 못했고, 법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용인된 것은 강제 한일병합(경술국치)이 되던 1910년이었다. 일본 헌법의 종교자유 명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종교 자유를 담보로 각종 규정을 통해 국민의 권리와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는 또 다른 탄압이 지속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것은 해방 이후인 1948년. 「제헌헌법」 제12조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國敎)는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는 조항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서는 이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여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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