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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당건축이야기

48.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by 세포네 2023. 12. 25.

더 높고 크고 장려하게… 레요낭 고딕의 첫걸음 내디딘 걸작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정면 야경. 출처=Wikimedia Commons

성당 공간 표현 완벽한 ‘고딕의 왕자’

더 높이, 더 크게, 더 장려하게. 12~13세기에 걸쳐 경쟁하듯이 꽃핀 대성당처럼 화려하고 장중하게 지어진 건축의 시대가 또 있었을까? 파리에서 북쪽으로 120㎞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의 오랜 도시 아미앵에 3대 고전 고딕 대성당의 마지막이면서 레요낭(Rayonnant, ‘빛나는’) 고딕의 첫걸음을 내디딘 걸작 아미앵 대성당(Cathdrale Notre-Dame d‘Amiens)이 솟아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건축 역사를 산맥에 빗댄다면, 고딕 건축 산맥의 최고봉은 샤르트르, 랑스, 아미앵 대성당이다. 그중 아미앵 대성당은 다른 두 성당보다 조금 더 뛰어나다. 공간 표현의 완벽함 때문이다. 건축이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회화 등 걸작과 통합되어 있으며, 회중석과 성가대석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성당을 ‘고딕의 왕자’라 한다.

아미앵 대성당에는 요한 세례자의 아래턱이 없는 얼굴 뼈가 보존돼 있다. 잔인하게 남은 이 머리뼈 유해는 수 세기 동안 여러 차례 분실되고 발견되다가 제4차 십자군(1202~1204) 때 피카르디 출신의 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어떤 궁전 폐허에서 투명한 수정 반구로 싸인 유물을 발견하고 이를 1206년에 아미앵의 주교에게 바쳤다. 이에 교회는 즉시 아미앵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자 순례자들이 모여와 도시가 크게 번영했다.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출처=Wikimedia Commons

1만 명 수용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당

이 성당은 역사적으로 몇 차례 파괴와 화재를 입었고, 1152년에 헌당된 로마네스크 대성당은 1218년에 낙뢰로 전소되고 말았다. 13세기 초 파리를 중심으로 높고 아름다운 대성당이 프랑스 각지에서 속속 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때 아미앵 사람들은 샤르트르나 랑스를 뛰어넘는 장려하고 거대한 대성당을 열망했다. 중세 아미앵은 모직물 산업과 파란색 제조의 원료 식물인 ‘대청’에서 얻은 염료 산업 덕분으로 크게 번창했으며, 대청 상인들이 크게 기부했다. 이에 힘입어 불과 2년 후인 1220년 건축가 로베르 드 뤼자르슈(Robert de Luzarches)에 의해 참신한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2년 후에는 토마 드 코르몽이, 또 그의 아들 르노가 이어 받았다.

성당 건설에는 긴 세월을 요하므로, 먼저 필요한 제단부부터 시작해 공사 중에도 완성한 부분부터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베이씩 완성되면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아미앵 대성당은 예외적으로 자금 계획에 상당한 자신이 있었는지 공구(工區)를 제단과 회중석으로 나누고 각각 모든 베이를 동시에 세웠다고 한다. 1236년에는 회중석이 먼저 완성됐고, 1264년에는 제단부를 포함한 주요부 공사를 마쳤다. 다만 남쪽 탑은 14세기 후반, 북쪽 탑은 15세기 초에 완성됐다.

서쪽 정면과 회중석은 랑스보다 먼저 세워졌다. 그러나 서쪽 정면의 완성도는 랑스보다는 명석하지 못하며, 이층 갤러리 위의 장미창은 많이 떨어진다. 그 플랑부아양(Flamboyant, 불꽃처럼 물결치는 모양의 창 장식) 장식은 후기 고딕 건축의 양식이지만 깊은 페디먼트 밑의 문 구성은 훌륭하다. 그러나 제단부는 랑스보다는 늦어서 새로운 양식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아미앵 노트르담에서는 처음부터 쌍탑만 계획했던 것 같다. 깊이 파인 문의 좌우 벽면에는 무수한 조각상이 있다. 지어졌을 때는 이 조각들은 선명하고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아직도 부분적으로는 안료가 아주 조금 남아 있다. 여름철과 대림 시기 밤에는 ‘크로마(Chroma)’ 디스플레이로 색채에 물든 서쪽 정면을 감상할 수 있다.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성단소와 제단. 출처=Wikimedia Commons

대성당의 내부 크기를 최대로 만들고자 했다. 전체 길이 145m, 회중석의 천장 높이 42.3m, 폭 70m이며 바닥면적은 약 7만 700㎡이고 부피는 20만㎥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두 개가 들어갈 크기다. 이 넓은 공간에 당시 아미앵 시민 1만 명 모두를 수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교차부에 솟은 지상 112m의 첨탑은 도시 어디에서나 올려다볼 수 있었다.

내부에 들어서면 쭉 늘어선 기둥에 둘러싸여 깊은 숲을 헤치고 들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중랑 벽 양쪽의 굵은 나무에서 뻗은 섬세한 가지가 천장의 아치를 그린다. 정말 숲의 큰 나무 사이에 둘러싸인 공간의 이미지다.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면 저 높은 곳에 뚫린 커다란 창에서 빛이 내리쏟아진다. 프랑스 미술사가 에밀 말르(Emile Mle)는 “거대한 수직선의 고상함이 먼저 마음을 흔든다. 자기 마음이 맑아졌다고 생각하지 않고는 아미앵의 거대한 회중석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초기 고딕의 전형인 랑(Laon) 대성당의 중랑 폭은 10m 남짓으로 작지만, 사르트르는 16m나 된다. 이에 비해 랑스는 13m인데, 아미앵은 이와 비슷하게 14m로 작다. 랑 대성당은 볼트 높이가 24m이나, 랑스는 38m, 샤르트르는 37m나 된다. 그런데 아미앵 대성당의 중랑 볼트의 높이는 42.3m에 이른다. 폭에 비해 높이가 무척 높아 치수로나 비례로 보아 내부 공간의 수직성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아미앵 노트르담 대성당 제단 위. 출처=architectureppf.com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의 합일 표현

샤르트르나 랑스 대성당에서는 고창층의 높이가 대(大) 아케이드와 같아 위아래의 아케이드와 고창층이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고창층 쪽의 크기가 더 커서 위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빛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이것이 고전 고딕의 특징이다. 그런데 아미앵에서는 대 아케이드 높이는 트리포리움과 고창층을 합친 것과 대략 같을 정도로 대 아케이드가 이상하게 높다. 그 정도로 저 하늘을 향하고자 하는 의도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중랑 벽에는 돌의 중량을 연상시키는 요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높은 고창층을 통해 들어온 빛은 중랑 벽의 하얀 돌에 반사되어 마치 중랑 벽이 얇은 막으로 덮인 듯이 보인다.

제단은 이런 중랑 벽을 따라 걷는 사람의 눈과 몸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제단 위는 거룩하신 분께서 대성당 안에 내재하시고 현존하시듯이, 반원의 리브가 횡단 리브 없이 같은 점에서 나와 벽을 따라 내려와 시선을 천장에서 제단으로 옮긴다. 이때 제단을 둥글게 둘러싸는 아치는 점점 작고 좁아진다. 그런 제단 뒤의 트리포리움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의 벽이 되었다. 아미앵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다. 중랑 벽의 트리포리움은 여전히 벽이지만, 제단의 트리포리움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바꾸었다. 아미앵 이후에는 빗물 처리가 어려운데도 스테인드글라스로 바뀐 트리포리움에 빛이 비치도록 측랑의 베이마다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을 올려놓았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트리포리움. 이 방식은 후에 생드니의 회중석에서 완성되지만, 이것은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의 합일,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제단은 돌로 조각한 장벽으로 에워쌌다. 남쪽에는 초대 주교 성 피르맹(St. Firmin), 북쪽에는 요한 세례자의 생애를 각각 8개로 새겨 놓았다. 그 안에는 오크로 만든 접이식 성직자석이 120개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을 장식하는 4000점이 넘는 목재 조각은 1508년에서 1519년 사이에 10명 정도의 숙련공이 만든 것이다. 아미앵이 자랑하는 작품인데 유감스럽게도 일반공개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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