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본당인 능교성당 옛 제대, 유구한 신앙 전통 웅변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태인공소는 1935년부터 1954년까지 19년간 본당으로 지역 복음화의 중추 역할을 했던 공소이다. 태인공소 전경 2015년 건립된 새 공소(오른쪽)와 복원한 옛 공소 |
병인박해 이후 깊은 산속에 교우촌 형성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태인공소는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24에 자리하고 있다.
태인면은 1409년 조선 태종 9년 태산현(칠보)과 인의현(백산) 두 고을을 병합해 ‘태인’이라 하고, 고을 터를 두 지역 중간 지점인 거산리로 옮겼다. 그리고 일제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내면과 인곡면, 흥천면을 병합해 태인면으로 했다.
태인은 조선 시대 전라도 지역 유교 문화의 중심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다. 태인이 유교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말엽 헌강왕(875~885년) 때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인 최치원이 태산 군수를 지낸 데서 비롯한다. 조선 초 문신이었던 불우헌(不憂軒) 정극인이 태인에 향악당을 설치했고, 1696년에는 최치원을 기리는 무성서원을 창건해 유교를 진흥시켰다. 태인은 또 조선 영조 임금의 어머니 최숙빈이 태어난 곳이고,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의 최후 전적지이며, 1919년 3ㆍ1 독립만세운동이 봉기한 곳이다.
태인 지방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였다. 경기ㆍ충청ㆍ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전라도 지역으로 피난 온 교우들은 태인ㆍ정읍ㆍ순창ㆍ수류 지역의 깊은 산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전라도는 전주와 진산에서 천주교 전파가 시작됐다. 초기 박해 이후 전주 부근의 모악산 일대와 임실 및 순창ㆍ태인ㆍ정읍ㆍ장성ㆍ담양의 산간지대가 주 도피처였고, 진산 부근으로는 진안ㆍ고산ㆍ장수ㆍ무주ㆍ함양 등지의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손병희와 손천민을 주축으로 하는 동학 농민군 호서군이 패전 이후 장성에서 담양, 순창 지계를 넘어 임실군 산곡간에서 해월을 만나 진안ㆍ장수ㆍ무주 등을 거쳐 간 도주로와 노선이 동일하다. 특히 전주와 진산 이 두 지역은 전주-신리-관촌-임실-오수-남원을 잇는 지금의 전라선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곳이다. 진산 배티재는 전주로 통하는 길이었고, 부리면 지삼치는 무주로, 솔티재는 용담으로, 남이면 구석리 고개는 진안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전주에서 남원을 잇는 이 라인의 주변에는 교우촌이 없었다. 특히 남원 지역은 교우촌이 하나도 없었다. 선교사들이 박해를 피해 장수와 진안 등지로 와서 활동하던 1880년대, 남원 지역에는 교우들이 거주했으나 박해가 끝난 후 공소가 형성됐다는 기록은 없다. 그것은 당시에도 이 라인은 전라도의 주요 읍성을 연결하는 길목으로 항상 포졸들을 비롯한 관리들과 상인들을 포함한 일반 기층민들이 많이 다니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라인은 교우들의 이동에 장애가 되는 차단선의 기능을 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순창군은 모악산과 연결되는 주요 통로로 볼 수 있고, 그 중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산외면과 칠보면, 내장산 일대 및 쌍치 등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모악산 일대의 가장 큰 교우촌이었던 김제 수류에 성당을 건립할 당시 노동력을 제공했던 주 공급원인 산외면과 칠보면 일대에 사는 교우들이 산줄기를 타고 며칠 동안씩 일을 하다가 돌아갔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신태인성당 75년사」 99-100쪽)
한옥 성당의 전통미를 보여주고 있는 옛 태인공소 건물은 회중석 가운데 남녀를 구분하는 기둥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
1935~1954년 19년간 본당 사목구
신태인본당의 모체는 1929년 5월 26일 정읍군 산내면 능다리에 설립된 능교본당이었다. 능다리 지역은 본당이 설립되기 전까지 정읍 신성리본당 관할 공소였다. 능다리공소 주변 지역에 교우들이 700여 명의 교세로 발전하자 1929년 5월 김창현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돼 본당으로 승격됐다. 김창현 신부는 능다리에 살면서 본당을 태인으로 옮길 것을 계획한다. 태인은 당시 교통의 요지였고 장래 본당 발전을 고려해 태인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신부는 본당을 태인으로 옮길 작정을 하고 태인면 태창리에 대지 400평을 매입해 성당 터로 삼았고, 오룡촌 교우 서병구를 태인에 전교회장으로 파견해 본당을 이전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김창현 신부는 1933년 5월에 제주도 서흥리본당으로 전임됐다. 그리고 제2대 주임으로 허일록 신부가 1933년 5월에 능교본당으로 부임해 김창현 신부가 계획했던 본당 이전을 추진했다. 허 신부는 태인에 성당 건물과 사제관을 신축한 후 1935년 5월 1일에 본당을 태인으로 옮겼다.(「신태인성당 75년사」 91쪽 참조) 그 후 1954년 5월 이대권 신부가 제7대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아 부임한 후에 태인에서 신태인으로 본당을 옮길 때까지 19년간 본당 사목구로서 지역 복음화의 중추 역할을 했다.
태인은 조선 시대 전라도 지역 유교 문화의 중심지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박해 시기 천주교인들의 피신처였다. 사진은 태인본당의 모본당이었던 능교본당에서부터 사용해 왔던 제대로 태인 지역 신앙 공동체의 유구한 전통을 웅변해 주고 있다. |
2015년 옛 공소 개축하고 새 공소 축복
그런데 2015년 옛 공소 개축과 새 공소 축복식과 함께 세워놓은 태인공소 안내판에는 허일록 신부가 1935년 5월 1일에 능교에서 태인으로 본당을 옮기고, 1938년 4월 18일 31평의 성당 본 건물을 신축하고 사제관과 부속 건물을 개축했으며, 당시 교구장이었던 주재용 신부가 축성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쪽은 성당을 지은 후 본당을 옮겼다 하고, 다른 한쪽은 본당을 옮긴 후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처럼 내용이 다른 기록은 교구나 본당 측에서 사실을 밝혀 바로잡아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주재용 신부는 1941~1946년 제2대 전주교구장으로 재임했다.
여하튼 1935년(또는 1938년)에 봉헌된 태인성당 건물은 공소로 사용되다 2015년 옛 모습대로 복원돼 깔끔하게 새단장했다. 또 새로 지은 공소도 봉헌했다. 허일록 신부는 1935년 태인본당을 설립하면서 능교본당 제대를 가져와 사용했는데 그 제대가 그대로 태인 옛 공소에 그대로 자리하면서 태인 지역 신앙 공동체의 유구한 전통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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