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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공소

40. 전주교구 칠보본당 능교공소

by 세포네 2023. 10. 29.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 지키며 공소 설립

능교공소는 병인박해를 피해 노령산맥 깊은 산 속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룬 김대건 신부 동생 김난식과 7촌 조카 김현채를 비롯한 충청도 교우들이 설립한 공소이다. 능교공소 전경

전주교구 칠보본당 능교공소는 전북 정읍시 산내면 능교신기길 12-10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 태인현에 속했던 산내면은 노령산맥 줄기 안쪽 지역이라 해서 산내(山內)라고 했다. 능교리는 노령산맥 노적봉 아래 자리한 중산간 마을로 구절재 능교를 넘어가면 해마다 10월 정읍 구절초 축제가 열리는 ‘구절초 지방정원’이 나온다.

능교공소는 한국 가톨릭교회 근대사 안에선 ‘능다리공소’로 더 알려졌다. 능교공소는 1899년 당시 수류본당 주임이던 라크루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그리고 1929년 5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된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노령산맥 깊은 골짜기에 교우촌 형성

전북 정읍과 전남 장성 사이에 있는 노령산맥의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교우촌이 자리한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다. 이 교우촌들은 순교자들의 가족이거나 박해를 겪은 교우들이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형성됐다. 병인박해 때 충남 한산 독메에 살다가 한양으로 끌려가 순교한 이 암브로시오의 아들 이명숙(도미니코)의 가족과 순교자 김 미카엘의 가족이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 정착해 수도공소 교우촌을 세웠다. 또 정읍군 산외면 구장리에는 한서원(요셉) 성인의 가족이 살았고, 입암면 등천공소에는 병인박해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조화서(베드로)ㆍ조윤호(요셉) 성인을 잘 알고 있는 조 프란치스코가 살았다.

능교공소는 성 김대건 신부의 일가와 연계돼 있다. 능교공소에서 산길로 약 3㎞, 국도로 약 14㎞ 떨어진 회문산 자락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생인 김난식(프란치스코, 1827~1873)과 재당질인 7촌 조카 김현채(토마스, 1825~1888)의 무덤이 있다. 김난식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선종한 후 병인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독신으로 화전을 일구고 토종벌을 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김현채는 부인 강 막달레나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수도자처럼 하느님만을 충실히 섬겨 신앙인의 본보기가 됐다고 한다. 양봉은 교우들에게 단순한 생계수단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미사 때나 기도를 할 때 초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초는 사제가 공소를 방문했을 때 신부에게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 부근으로 교우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1893년에는 무덤 근처 먹구니(산내면 종산리)에 공소가 생겼으며, 6년 후인 1899년에는 능교에 공소가 생겼다. 박해를 피해 산중에 살았던 먹구니공소 교우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농사를 지을 농토를 찾아 점차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능교공소를 이룬 것이다. 이렇게 한때 회문산 일대에는 공소가 58곳이나 됐다는 사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 선조들이 얼마나 충실히 신앙을 지키고 키워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교우들이 전라도로 피신한 이유가 있다. “1866년 박해 때 전라도는 상당히 관대하게 이 사건을 다루었고, 다른 지방처럼 그렇게 포악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교우들은 다른 지방에서보다 쉽게 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은 자연히 비신자들과 격리돼 산속에 무리 지어 살게 됐다.”(「리우빌 약전」 중에서)

6ㆍ25 전쟁 당시 능교공소 교우 6명이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남부군에 의해 순교했다. 능교공소 내부로 성체 신심이 깊은 교우들의 신앙심을 반영하듯 제단 뒷벽에 장식된 커다란 감실 벽이 이채롭다

1929년 본당으로 승격됐다가 공소로 전환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05년 11월 24일 능교공소를 방문해 교우 37명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1929년 5월 대구대목구는 7명의 새 사제를 배출했다. 그중 5명이 전라북도 출신이었다.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전라북도 부안 출신인 김창현 신부에게 산내ㆍ산외ㆍ칠보면과 순창 쌍치면 지역 공소를 관할할 본당을 세우도록 발령했다. 김 신부는 이에 교통이 편리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능교리에 본당을 설립했다. 김 신부는 능교리에 20평 규모의 목조 성당과 사제관과 사무실 등으로 쓸 초가 5칸을 지어 본당을 운영했다.

그리고 김 신부는 1930년 동학과 개신교 영향으로 관할 내 교세가 약해지자 본당을 태인으로 옮길 작정을 하고 태인에 성당 터 400여 평을 매입해 초가 3칸을 지었다. 이에 제2대 능교본당 주임 허일록 신부는 1935년 본당을 태인으로 옮겼고, 제7대 주임 이대권 신부는 1954년 신태인에 새 성당을 지어 본당을 옮겼다. 따라서 능교공소는 오늘날 신태인본당의 모체이다.

능교공소에 설치된 성모상

6ㆍ25 전쟁 때 능교공소 교우 6명 순교

능교공소는 6ㆍ25 전쟁 때 큰 희생을 치렀다. 산내면 회문산과 순창군 쌍치면은 당시 ‘남부군’의 주요 활동지였다. 특히 장군봉 가마골은 9ㆍ28 서울 수복 후 1년이 지나도 우리나라 군경이 발을 들여놓지 못한 지역이었다.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남부군에 의해 태인본당 교우 22명이 순교했다. 그중 능교공소 교우 6명이 순교했다. 이들 중 안창우(베네딕토)는 천주교 교우일 뿐 아니라 반공을 선동한다고 해서 좌익인사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샀다. 그는 1950년 12월 7일 빨치산에 체포돼 그날 순교했다. 안창우 외에 능교공소 남교우 4명과 여교우 1명도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현재 능교공소는 2008년 칠보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됐다. 현 공소 건물은 2008년에 지어졌다. 붉은벽돌로 마감한 공소 지붕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상징하는 세 개의 조형물이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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