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빈·부통 신부, 성당 설계하고 벽화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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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빈 신부는 성당 건축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멘트벽돌을 쌓아 회반죽으로 미장하고 수성 도장으로 마감하기를 즐겨했다. 아포공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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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부통 신부가 아포공소 제단 뒷벽에 그린 주님의 마지막 만찬 벽화. 양손에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작을 들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집에 모든 이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교황청, 1956년 ‘왜관감목대리구’ 정식 인준
남자 수도회로 1909년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서울 백동 수도원, 덕원ㆍ연길 수도원을 거쳐 1952년 왜관에 정착한다. 선교 수도회인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당시 사제수가 부족했던 대구대목구의 위탁을 받아 김천ㆍ상주ㆍ함창ㆍ점촌 등 왜관 북부 지역 본당 사목을 위임받는다. 이를 계기로 교황청은 1956년 3월 ‘왜관감목대리구’를 정식으로 인준 설정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이때부터 1986년 왜관감목대리구를 해체하고 관할 모든 본당을 대구대교구에 이관할 때까지 30년간 20개 본당을 신설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현재 왜관수도원은 칠곡군 내 왜관ㆍ석전ㆍ낙산ㆍ약목ㆍ신동본당과 대구 대명동본당 등 6개 본당을 대구대교구로부터 위임받아 사목하고 있다.
왜관감목대리구 시절 성당 건축과 성당 벽화 장식에 모든 열정을 쏟은 두 수도자가 있다. 바로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한국명 안경빈, 1904~1978) 신부와 앙드레 부통(Andre Bouton, 한국명 부보경, 1914~1980) 신부이다. 이번 호에는 알빈 신부가 설계 건축하고 부통 신부가 벽화를 그린 대구대교구 구미 봉곡본당 아포공소를 소개한다.
알빈 신부 설계하고 부통 신부 벽화 제작
“알빈 신부가 독일에서 설계한 김천 평화성당은 현대식 성당의 모델이다. 성당을 보려고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바야흐로 남한 선교 사업의 큰 성공을 거두어 알빈 신부는 1964년 올 한해 10개의 성당을 설계했다. 이곳은 다른 모든 설계의 표본을 제시하는 그의 선구적 업적이다.”
제2대 김천 평화본당 주임 김영근(베다) 신부의 「김천 연대기」에서 알빈 신부가 국내 처음으로 설계한 평화성당을 소개한 내용이다. 이처럼 1960년대 왜관감목대리구는 교회 건축의 황금기를 누린다. 성당과 공소 건물이 속속 새롭게 들어섰다. 특히 왜관감목대리구 내 신축 교회 건축물 여러 곳의 내부를 벽화로 장식해 한국 교회 미술의 부흥도 함께 가져왔다. 벽화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 모자이크나 색유리화보다는 더욱 저렴하게 성당 내부를 장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 강렬한 느낌을 줘 교우들의 신심을 북돋는 탁월한 소재였다. 알빈과 부통 신부가 협업해 성당을 짓고 벽화를 남긴 것은 국내에 모두 10곳이 있다. 아포공소가 그중 하나다.
김천시 아포읍 국사길 62-6에 자리한 아포공소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지원으로 30평 규모의 흙벽돌 건물을 지어 공소로 사용했다. 아포공소는 당시 구미본당(현 구미 원평본당) 관할이었다. 1960년대 구미는 불교의 색채가 강했던 도시였다. 금오산 꼭대기의 약사암과 산 중턱 해운사와 금오사, 시내 곳곳에 있는 사찰로 선교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제3대 구미본당 주임 노규채 신부는 왜 사람들이 성당에 오지 않는지를 「구미 연대기」에 이렇게 적었다. “한 남자가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에게 갔다 왔다고 주장했다. ‘하나님’ 오른쪽에 있는 피둥피둥 살찐 사람들이 웃으면서 서 있었고, 왼쪽에는 바싹 마른 사람들이 울면서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조상들이었다. 신자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굶다가 그런 비참한 꼴이 되었다. 이는 타락한 자손들의 잘못이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그를 하늘에서 추방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승으로 돌아와 조상을 섬기지 않는 외래 종교에 대해 경고를 보낸다는 것이다.”(「분도통사」, 1676~1677쪽)
왜관수도원 지원 받아 아포공소 봉헌
왜관수도원의 선교사들과 사목자들은 유교와 불교 색이 강한 지역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반듯한 성당’을 요구했다. 그래서 알빈 신부는 1964년 제대를 벽에서 분리해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주례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다들 거룩한 제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기뻐했다.
아포공소도 이렇게 지어졌다. 때마침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자 구미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이석진 신부가 왜관수도원의 지원을 받아 1968년 10월 아포공소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 성당을 지어 축성 봉헌했다. 아포는 신라 이전 삼한시대 때부터 형성된 오래되고 비옥한 농촌이다. 또 김천과 구미, 선산을 잇는 교통 요충지이다. 이곳에 알빈 신부는 지역 환경과 이질감이 없는 야트막한 공소를 지었다.
육각형 평면의 대각선을 축으로 공간을 넓혔고, 종탑 꼭대기에 십자가와 성령 강림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설치, 이곳이 가톨릭 교회임을 알렸다. 아포공소 역시 알빈 신부가 즐겨 사용했던 시멘트벽돌을 쌓아 회반죽으로 미장하고 수성 도장으로 마감했다. 제대는 제단 벽과 분리했고, 네 벽면 모두 창을 만들어 채광을 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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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공소 제단 왼쪽 벽면에 장식된 부통 신부의 ‘주님 수난’화. 십자가 상에서 눈을 부릅뜨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채롭다. |
제단 뒷벽에 주님의 마지막 만찬 장면 그려
아포공소의 화룡점정은 부통 신부의 벽화이다. 제단 뒷벽에는 성체성사를 세우신 주님의 마지막 만찬 장면이 그려져 있다. 양손에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작을 들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집에 모인 모든 이와 함께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당 왼쪽 벽에는 주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 형상이, 오른편 벽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묘사돼 있다. 또 제대 정면 왼편 벽에는 성모자화가 장식돼 있는데 한국의 여느 아낙들처럼 성모님께서 한복 차림에 흰 두건을 두르고 계신 것이 이색적이다.
한때 공소 신자 수가 150여 명을 넘었으나 1990년대 구미공단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면서 아포공소 교세는 조금씩 쇠락했다. 아포공소는 2003년 8월 구미 봉곡본당이 설립되면서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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