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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공소

14. 수원교구 향남본당 용소리공소

by 세포네 2023. 4. 23.

유서 깊은 양간 교우촌 신앙 전통 계승

수원교구 향남본당 용소리공소는 1820년께부터 형성된 유서깊은 남양도호부 양간 교우촌에 설립된 공소이다. 용소리공소 전경.
용소리공소는 한 때 교우 수가 200여 명이나 되는 공소였다. 용소리공소 내부
용소리공소 내부에 마련돼 있는 고해실.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은 조선 시대 남양도호부에 속한 지역이다. 남양도호부는 경기 화성시의 남양읍,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비봉면, 장안면, 우정읍, 팔탄면 일부, 향남읍 일부, 양감면 일부 지역과 인천 옹진군 덕적면, 자월면, 영흥면 지역,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간면과 감미면이 병합돼 ‘양감면’이 됐다. 양감면은 고도 100m 이하의 구릉과 평야 지대로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고, 잎담배 농업이 유명하다. 현재 양감면에는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많은 시설과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양감은 한국 가톨릭교회사 안에서는 ‘양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남양도호부는 초기 조선 교회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울과 남한강 일대, 내포 지역과 교류가 있었고,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 교우들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학징의」에는 수원에 살던 이지성이 1793년께 사위 이지번에게 천주교 서적 한 권을 건네며 천주교 입교를 권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또 서울에 살던 제관득이 1801년 박해 당시 수원, 남양 등지로 피신하다 오가작통제 감시망에 걸려 남양 구포리(현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에서 체포됐다. 제관득이 피신지로 삼은 남양 지역 곧 오늘날 화성 지역에 연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이곳에 신앙 공동체나 교우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817년에는 수원 감탕개(오늘날 평택시 포승면 석정리)에서 교우 이용빈이 가문에서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사학징의」에 나온다.

경기도 남서부 지역인 남양도호부에 교우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시기는 1820~1830년대이다. 이 시기 형성된 대표적인 교우촌이 바로 ‘수원 갓등이’(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와 ‘양간’(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이다. 이 시기 남양도호부 출신 대표 인물은 바로 최 프란치스코이다. 그는 남양 출신 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로 최양업ㆍ김대건과 함께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 갈매못에서 순교한 장주기(요셉) 성인과 그의 6촌 형제인 복자 장 토마스,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 순교자가 수원 느지지(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출신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사목 중심지

양간은 박해 시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목 중심지이기도 했다. 1838년 모방 신부가 양간 교우촌에서 성사를 집전했고, 그다음 해인 1839년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양간을 사목 방문했다. 당시 양간 교우촌 회장은 충청도 정산 출신 정화경(안드레아)이었다.

양간은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이후 지속해서 복음 전파의 근거지였다. 배론 신학교 권 요한 신학생은 수원 생골(오늘날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 출신으로 권양수의 아들이었다. 또 1859년 수원 출신 김명서(유시나)는 서남면(현 화성시 향남읍)에 사는 황지홍의 권유로 입교해 그의 집에서 오메트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아울러 1860년대 무렵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양간 일대를 사목 방문해 성사를 집전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1830년대부터 양간 교우촌 일대에 여러 교우촌이 형성됐음을 알려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갓등이는 별 피해가 없었으나 양간에서는 조명오(베드로), 홍기현(베드로), 홍원여(가롤로)가 체포돼 한양에서 순교했다.(「병인치명사적」참조) 양간은 1883년부터 1885년까지 뮈텔 신부의 사목지였다. 1884년 양간에는 100명이 넘는 교우들이 신앙생활을 했다.

▨ 용소리(양간)공소

수원교구 향남본당 용소리공소는 유서 깊은 양간 교우촌의 신앙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공소이다.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양간큰말길 36번길 17에 자리하고 있는 용소리공소는 1888년 수원교구 모본당인 갓등이(왕림)본당 설립과 함께 공식 관할 공소가 됐다. 갓등이본당은 수원, 화성, 오산, 평택 지역을 근간으로 해 북쪽으로는 과천, 시흥, 의왕, 광주 북부, 동쪽으로는 광주 남부, 용인, 안성 일부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한 마디로 양평, 여주, 이천을 제외한 현재 수원교구 지역 대부분을 관할했다. 그래서 갓등이를 수원교구 모본당이라 부른다. 초대 주임 앙드레 신부는 블랑 주교에게 보낸 1888~1889 연말 보고서에서 “신자들 대부분이 구교우 집안의 후손들로 척박한 땅이나 산 중턱 경사지를 찾아 개간해서 산다”고 밝혔다. 앙드레 신부 후임인 알릭스 신부는 1890년대 초 양간에 강당을 지어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도왔다.

1910년대 들면서 양간 지역은 교세가 급속히 확장됐다. 1917년 용소리공소 신자 수는 140명이 넘었다. 그래서 갓등이 주임으로 부임한 김원영 신부는 본당 후보로 양간과 궁리(건곤이), 가마골(적봉리)공소를 뮈텔 주교에게 추천했고, 뮈텔 주교는 1926년 가마골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했다.

유서 깊은 용소리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될 수 없었던 것은 첫째, 본당을 지원할 부유한 신자가 없고, 둘째, 본당 재정 기반인 대목구 소유 경작지가 없고, 셋째 유능한 회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뮈텔 주교 문서 1925‘81」김원영 신부의 1925년 5월 25일 자 서한 참조)

용소리공소는 1920년대 중반 교우수가 100여 명에서 50여 명으로 급감했다. 가난한 경제 상황이 교세 위축을 불러온 것으로 보이다. 이후 큰 변화 없이 50명 선의 교우를 유지했다.

용소리공소 교우들은 공소 활성화를 위해 1967년 용소리 486번지 일대 366㎡ 부지를 쌀 11가마 반을 주고 서연석(베드로)ㆍ홍성표(베네딕토)ㆍ안태식(가브리엘) 3명의 공동명의로 구매했다. 1968년 6월 10일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가 새 공소 건물 봉헌했다. 새 공소 건물 봉헌을 계기로 공소가 활기를 띠어 교우 수가 200여 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1970년 8월 사창리공소를 분리했다.

수원교구 현민수ㆍ현정수 신부가 용소리공소 출신이다. 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홍미표(아가타) 수녀를 비롯한 5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안병래(베드로) 공소 회장은 “현재 공소 신자는 10명으로 대부분 고령”이라면서 “젊은이가 없어 유서 깊은 공소를 유지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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