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No.5 in E minor, Op.64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5번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1893
5번 교향곡은 4번과 녹음 시기가 약 20년이나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4번에 비해서 상당히 세련되고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어느 한순간 템포의 급한 변화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4번에 비해서는 좀더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선율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 구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중 하나인 민해경의 명곡 가운데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노래가 있다.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이 첫 부분이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동기이다. 그런데 이 동기가 이 곡 첫 머리에서부터 조성을 바꿔가며 마지막 악장 끝까지 사용되는 순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분명히 들리는 동기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민해경'을 떠올리게 할 만큼 유사하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나 베토벤 비창의 선율을 팝 음악에 인용하듯이 이 곡의 작곡가도 그런 시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곡은 '민해경 교향곡'이라는 별칭을 가질 만하다. 앞서 언급한 '민해경 주제'는 곡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데, 흔히들 이 멜로디가 운명을 상징한다고 한다.
제1악장 (Andante - Allegro con anima) 서주가 붙은 소나타 형식. ‘콘 아니마’는 직역하면 ‘영혼을 담아서’라는 뜻이다. 보통 ‘활기차게’ 정도로 해석되지만 악상 전개를 들어보면 여기서만큼은 달리 파악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그냥 직역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E단조 4/4박자의 서주 첫머리에 등장하는 어두운 클라리넷 선율은 교향곡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악상이다. 이것을 ‘운명의 동기’라고도 부르는데, 굳이 추상적인 것을 꼭 주관적인 개념을 틀에 맞춰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런 식의 고착화된 해석은 주로 일본 쪽에서 넘어온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그냥 되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서주 악상이 별다른 발전 없이 몇 차례 반복된 후 주부로 들어가면 6/8박자로 변한다. 클라리넷과 바순이 옥타브로 연주하는 1주제는 서주 악상과 마찬가지로 어둡지만 한층 생동감이 있으며, 이 주제가 여러 가지로 변화해 등장한 뒤 B단조의 유려한 경과구 주제를 거친 뒤 D장조의 온화한 제2주제로 넘어간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에 기초하고 있는데, 대부분 전개라기보다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현부에서는 경과구 주제가 C샤프단조, 2주제가 E장조로 등장한다. 코다는 강렬한 1주제 동기로 클라이맥스를 구축한 뒤 조용히 끝난다.
제2악장 (Andante cantabille, con alcuna licenza - Moderato con anima -Andante mosso - Allegro non troppo - Tempo I) 괴상한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악장의 악상지시어는 ‘안단테로 노래하듯이, 다소 자유롭게’라는 뜻이다. 박자 역시 악상지시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이한 편이어서 12/8박자이다. 조성(D장조)과 형식(세도막 형식)은 상대적으로 평이하다(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의 간단한 도입에 이어 호른이 주선율을 노래한다. 매우 달콤하면서도 그리움에 찬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선율은 앞서 말했듯이 대중음악에 차용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얼마 후 오보에가 연주하는 F샤프장조의 부주제가 부드럽고 밝은 표정을 띠고 나타난다. 이 주제는 확대되어 정점에 이른 뒤 가라앉고, 이어 F샤프단조 4/4박자의 중간부로 넘어가면 클라리넷이 새로운 악상을 연주한다. 이것이 점차 고양되어 악상이 다시 정점에 이르면 서주 악상이 강렬하게 덮어씌우듯이 연주되며, 여기서 중간부가 끝난다. 세 번째 섹션은 첫 번째와 거의 동일하지만 오케스트레이션 등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코다에서 서주 악상이 다시 한 번 활약한 뒤 조용하게 끝난다.
제3악장 (Valse. Allegro moderato) A장조, 3/4박자. 보통 교향곡의 3악장에는 미뉴에트(고전파 교향곡)나 스케르초(낭만파 이후)가 오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왈츠를 사용하는 파격을 감행했다(이 시도는 당시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유려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왈츠 섹션과 민활하게 움직이는 무궁동풍의 악상을 지닌 중간부가 멋진 대비를 선보인 뒤 다시 왈츠 섹션으로 돌아간다. 말미에 서주 악상이 다시 등장하는데, 바순으로 연주되어 음색 면에서 원 악상과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북방의 왈츠 왕’으로 불리기도 했던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가운데서도 손꼽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제4악장 (Finale. Andante maetoso - Allegro vivace - Molto vivace -Moderato assai e molto maestoso - Presto) ‘안단테 마에스토소’(안단테로 장엄하게)로 지정된 긴 서주(악장 전체의 1/3 가량을 차지한다)는 E장조, 4/4박자이며 론도의 요소가 가미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주 악상이 장조로 바뀌어 처음에는 현악 합주로, 그 다음에는 현이 반주하는 관악 합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팀파니와 더불어 현악기군이 강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하는 1주제가 주부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이를 받는 8분음표+점4분음표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오보에 독주가 경과구를 형성해 잠시 전개된 뒤 목관이 연주하는 희망에 찬 느낌의 2주제가 연주된 뒤 금관이 서주 악상을 다소 거칠게 연주하면서 발전부에 접어든다. 여기서는 1주제와 2주제 모두 발전하며, 재현부 말미의 강렬한 팀파니 연타 뒤 전 관현악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여기서 박수를 치는 것은 공연장 예절을 이야기할 때 실수로 흔히 거론되는, 아주 ‘고전적’인 예이다) 다시 트럼펫이 서주 악상을 당당하게 연주하면서 코다로 접어드는데 여기서부터는 일종의 행진곡으로 볼 수 있다. 악상은 점차 고조되어 잠시 프레스토로 휘몰아친 다음 1악장 1주제가 6/4박자로 변형된 채 당당하게 연주되면서 끝난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포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에서 광활하고 화려한 슬라브적인 정서를 분명히 느낄 수 있지만, 무소르그스키나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음악만큼은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독일 낭만주의를 배운 사람이며, 서유럽을 향한 창이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유럽 낭만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음악을 작곡했다. 따라서 드보르작이 보헤미안의 정서를 그렇게 한 것처럼, 차이코프스키도 독일 낭만주의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정서를 표현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연주자나 러시아의 오케스트라가 가장 잘 연주할 것이라는 예측은 보통 보기 좋게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1888년 8월에 완성되어 11월에 작곡가 자신에 의해 초연되었을때, 평론가의 반응은 나빴지만 청중들은 큰 갈채를 보냈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6개의 교향곡 가운데에서 가장 변화가 많고 또한 가장 열정적인 곡으로 뚜렷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서 순음악형식을 취하면서도 표제악적인 요소가 짙다. 여기에 나타난 것은 고뇌하여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인간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치는 운명의 마수이어서 처참한 느낌을 듣는 사람에게 던져준다. 극도의 멜랑콜리한 감성과 광분적인 정열사이의 갈등, 또는 회환과 낙관적인 마음간의 갈등은 차이코프스키의 본성이었다. 마음 깊은데서 우러나온 패배의식뿐만 아니라 불같은 열정의 분출은 차이코프스키의 창작열에 불씨를 당겼다. 차이코프스키의 독특한 특성인 선율의 어두운 아름다움과 구성의 교묘함, 그리고 관현악의 현란한 묘기등이 이 곡의 가치를 한층 드높여준다. 인간의 슬픔을 처절하게 통곡하는 교향곡.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를 쓰던 즈음 차이코프스키는 작곡가로서 최고의 전성기에 잇었다. 그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유럽에서도 인기가 좋아 자주 해외여행을 하였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녀야 했다. 유럽에서도 인기가 좋아 자주 해외 여행을 하였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녀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차이코프스키는 잊을 만하면 규치적으로 재발하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했다.그럴 때 마다 그가 찾은 것은 메크 부인이었으며, 힘들 때마다 그녀에게 열렬히 편지를 썼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가 힘들 즈음에 메크 부인의 건강이 나빠졌으며, 그녀는 요양을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 프랑스의 니스로 갔다. 그녀와 헤어짐-아니 그녀의 편지와의 헤어짐이라고 해야하나-은 그를 더욱더 힘들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글씨를 그리워했는지 아십니까?"이때 작곡된 대표적인 곡이 교향곡 제5번이다. 그녀에 대한 차이코프스키의 애증과 미련과 갈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도 이 곡이다. 이 교향곡 느낌은 일견 슬픈 것 같지만, 그 보다는 내적으로 침잠하는 철학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명곡이다. 이 곡이 주는 아름다움은 참으로 뛰어나며 어두운 색체가 주는 질감은 부드럽고 그 직조는 탄탄하다. 슬프면서도 달콤한 멜로디가 선사해주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세련되기 그지없다.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작곡가들이 슬픔을 그릴 때 그것에 대한 극복과 관조에 주력했다면, 차이코프스키는 오로지 통곡만 하는 느낌이 강렬하다. 이처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만큼 인간의 슬픔을 그토록 처절하게 울면서 그린 작품도 흔치 않을 것이다.그의 교향곡들이 그토록 통곡하는 것은 그 속에 어쩌면 우리의 한限과 같은 것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그의 작품에 유달리 애착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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