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공소

(6) 춘천교구 운천본당 관인·양문공소

by 세포네 2023. 2. 12.

전교회장의 두터운 신심 위에 성장한 두 공소

▲ 운천본당 관인공소는 1950년대 중반에 설립된 공소이다. 현재 인보성체수도회 수도자들이 파견돼 있다. 관인공소 전경
▲ 양문공소 신자들. 젊은 시절에는 성체를 모시기 위해 운천성당까지 걸어서 미사에 참여할 만큼 열심이었다고 자랑한다.

포천(抱川)이란 지명은 1413년 조선 태종 13년에 생겨난 이름이다. 삼국 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땅이었을 때 포천은 ‘들’로 불렸다. 물이 많은 골이라는 뜻이다. 신라 진흥왕 때에는 이곳에 굳건한 성을 세워 군사 요충지로 만들었다 해서 ‘견성’(堅城)이라 불렀다. 고려 때에는 ‘포주’라 불리다 물이 들어오는 것은 없고 밖으로 흘러나가기만 한다 하여 ‘안을 포(抱)’ ‘내 천(川)’ 자를 써서 조선 초부터 ‘포천’이라 불렀다.

강원 서부 지역의 전교회장

경기도 포천 지역은 경기 북부와 강원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초기부터 이 지역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1962년 3월 10일 성 요한 23세 교황은 한국 교회 교계 제도를 설정했다. 서울대목구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대목구가 정식 교구가 됐다. 이때 1955년에 설정된 춘천대목구 역시 춘천교구가 됐다. 이후 1969년 5월 한국 교회는 각 교구 관할 구역을 조정했다. 이때 포천군과 가평군이 춘천교구 관할로 편입돼 포천과 청평ㆍ가평본당이 춘천교구에 소속됐다. 1971년 포천본당 운천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다. 운천(雲川)은 ‘구름내’라는 우리말의 한자음 표기로 한탄강 맑은 물에 구름이 비치면 마치 구름이 물속에 잠긴듯해 이 지역을 운천이라 불렀다.

운천과 철원의 가톨릭 복음 전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홍수명(타대오, 1920~1995) 전교회장이다. 운천본당 관할 관인ㆍ양문공소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홍수명 회장을 소개한다.

홍 회장은 강원도 고성의 신심 깊은 교우 집안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며 철원에 정착했다. 1962년 퇴직한 그는 1963년 철원본당 지포리 공소 전교회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철원본당은 강원도 철원읍과 갈말면, 동송면과 경기도 관인면을 관할했고 지포리ㆍ용화동ㆍ문혜리ㆍ관인 공소를 두고 있었다.

홍 회장은 철원본당 관할 지역을 전교하면서 신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찾아다녔다. 특히, 그는 자전거로도 가기 힘든 오지 공소를 매주 꼬박꼬박 찾아가 공소 예절을 주도하고, 교리를 가르쳤다.

홍 회장은 운천공소가 1970년 11월 본당으로 승격되고 관인, 지포리, 문혜리 공소가 운천본당으로 이관되었지만, 여전히 그 지역을 다니며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또 신설된 양문공소에서도 활동했다. 홍 회장은 강원도 서부 지역의 신자들에게 언제나 자상하고 친절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본당 사제가 외국인이고 또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던 신자들은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의논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홍 회장을 찾았다.

홍 회장은 철원과 운천본당 지역 내 군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는데 열성을 다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혼자서라도 찾아다니고, 초상이 나면 제일 먼저 찾아가 연도를 바치고, 항상 염을 해주었다. 신자들은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홍 회장을 찾았다.

1985년 12월 공식적으로 전교회장직을 사임한 그는 오늘날 춘천교구 갈말본당 사제관 자리에 살면서 공소 신자들의 신앙의 모범이 됐다. 1995년 선종한 그는 지금까지 ‘갈말본당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다.

춘천교구는 교구 설정 7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우리 선조 우리 터전」에서 홍수명 회장을 서부 지역에 신앙의 빛을 밝힌 우리 시대의 신앙의 증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춘천교구는 홍수명 회장에 대해 “항상 공부하며 부족함을 채워나가고자 했고, 신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갔으며, 어렵고 험한 일을 마다치 않고 솔선하며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들에게는 늘 남을 위해 살라는 말씀으로 모범을 보였다”라고 칭송했다.

역대 전교회장의 선교 정신과 신앙의 모범이 지금도 운천본당 관할 지역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바로 관인공소와 양문공소이다.

관인공소

6ㆍ25 전쟁 휴전 이후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일대에는 많은 이재민이 천막촌을 이뤄 어렵게 생활했다. 이 시기 한국 교회는 미군의 도움으로 성당 재건에 힘썼다. 전쟁을 통해 하느님의 이끄심과 보호하심을 새삼 인식한 교회는 외벽을 화강석으로 치장해 성채처럼 굳건한 모습으로 성당을 지었다. 옛 포천성당도 그중 하나이다.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창동로 1828-15에 자리한 관인공소는 운천본당이 설립되기 이전 철원본당에 소속된 공소였다. 1954년 미군 병원 건물을 철월본당이 인수해 관인 공소를 설립했다. 관인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을 건국했을 때 어진 관리들이 관직을 버리고 성 밖에 모여 산 지역이라 해서 ‘관인(官仁)이라 불렀다 한다.

관인공소는 당시 철원본당 안일호(치릴로) 전교회장의 활동으로 활성화됐고 1997년 4월 지금의 공소 모습으로 개축됐다. 공소는 2016년 인보성체수도회 우순옥(루치아)수녀가 파견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맡았다. 우 수녀는 성체성사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돌보는 ‘인보(隣保)’ 정신에 따라 사도직 소임을 다하고 있다.

여느 농촌 공소와 마찬가지로 관인공소도 비어가고 있다. 60여 명의 신자 대부분이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이다. 코로나 이후 40여 명이 공소에 나오지 않고 쉬고 있다고 한다. 우 수녀는 “공소에 젊은이가 없어서 너무 안타깝다”면서 “수도자로서 열심히 기도하고 기쁘게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문공소, 자택을 공소로 봉헌한 신자

양문공소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로 10길14-12에 자리하고 있다. 영중면은 1914년 영평군이 포천군에 병합될 때 영평군의 중앙에 있었다 해서 ‘영중(永中)’이라 하였다고 한다.

양문공소는 조치원·윤 마르타 부부가 1935년 가평에서 이사와 자신의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면서 시작됐다.

지금의 공소는 윤 마르타 할머니가 100여 평의 초가를 기증함으로써 1997년에 지어졌다. 고인이 된 윤 할머니는 지금의 공소 회장 이은주(안젤라)씨의 시할머니이다. 이 회장의 남편 조찬형(안드레아)씨 집안사람들이 양문공소 회장직을 번갈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열심한 조씨 집안에서 공소로 이용했던 자신의 집을 신앙의 못자리로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양문공소 신자는 모두 15명. 대부분 70~80대이다. 그래서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매년 1월부터 3월까지 한시적으로 폐쇄한다. 이은주 공소회장은 “시할머니로부터 과거에는 성체를 모시기 위해 운천성당까지 걸어서 미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신자 수가 적고 고령이지만 모두 열심한 신자들”이라고 자랑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