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일의 복음은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산 인생을 하느님과 셈하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인생 결산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산 인생이 과연 칭송받을 만큼 잘 산 인생인지,
야단맞아도 쌀만큼 잘못 산 인생인지 셈하는 내용이며
그것도 다른 분이 아니라 하느님과 셈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우리는 인생을 왜 하느님과 결산할까요?
내 인생이니 그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것이 신앙인인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요,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는
그 뜻하신 바가, 곧 생명을 주시고 은총을 주신 뜻이 있으실 겁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주신 생명과 삶을 소중히 여기며 잘 가꾸는 것인데
그것이 우선은 주신 생명과 삶에 대해서 타박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고, 왜 이런 인생을 주셨냐고 타박하지 않는 겁니다.
부모에게 제일 몹쓸 짓은 언제 내가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냐고,
왜 이런 인생을 안겨주셨냐고 타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타박할 때 부모는 우선 자식이 행복하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마음 아프실 것이고, 당신이 충분히 주지 못하셔서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 아프실 겁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집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때 제일 마음 아파하실 것이고,
우리가 행복할 때 제일 기뻐하시고 우리가 행복한 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부모와 달리 주실 수 없어서 못 주신 것이 아니고,
주셔야 할 것을 못 주신 것도 아니지요.
하느님은 주셔야 할 사랑을 주셨고,
혹 인간은 부족하여 부모의 사랑이 부족해도
하느님은 부족함이 없으시기에 부족함 없이 사랑을 주셨으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행복하기에 부족함 없도록 사랑을 주셨지요.
그러나 돈이나 능력은 하느님께서 달리 주셨고 각기 알맞게 주셨습니다.
달리 주신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신 것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 알맞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능력에 따라 주시는 것이 그에게 알맞게 주시는 것이지요.
다만 각 사람에게 능력에 따라 돈을 달리 주셨는데 그것이
사랑을 많이 주고 적게 주신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고,
그러기에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능력에 따라 돈을 많이 주신 것이 더 사랑하신 표가 아니고,
돈을 적게 주신 것이 덜 사랑하신 표가 아니며
돈이 많고 적음은 사랑 차별이 아니고 행복과 불행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능력과 돈은 행복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능력과 돈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지 않고,
이웃사랑을 위해 쓰고, 이웃의 행복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기에
주신 것을 가지고 셈하실 때 그것을 얼마나 사랑을 위해 썼냐고
우리에게 따지실 것이고 그렇기에 능력과 돈을 많이 주신 것을
우리는 마냥 '좋아라'만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무게를 느껴야겠지요.
나의 행복은 능력과 돈에 있지 않고 나의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고,
내 능력과 돈은 얼마나 사랑을 위해 쓰느냐에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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