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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순교자

1. 기해박해 순교자 (상)

by 세포네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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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1839년)ㆍ병오(1846년)ㆍ병인박해(1866년) 등 잇따른 박해도 하느님을 향한 순교자들의 믿음을 꺾지 못했다.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도 신자들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고, 성직자들은 고통을 겪는 신자들 안위를 위해 스스로 관청을 찾아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기 순교자 중 103명이 한국 교회 최초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 중에는 가족이 함께 서로의 신앙을 독려하며 신앙을 굳건하게 지킨 이들도 있었다. 일가족이 함께 순교의 길을 걸었고, 모녀, 형제자매가 서로의 신앙을 독려하며 순교의 화관을 썼다.

교회는 9월 순교자 성월이면 신앙 선조들의 순교 신심을 기리며 기도한다. 특히 올해 순교자 성월에는 103위 성인화가 시성 36년 만에 완성돼 기쁨을 더하고 있다. 103위 순교 성인의 이야기를 가족 중심으로 엮어 박해 순으로 4회에 걸쳐 소개한다.

1. 기해박해 순교자 (상)

2. 기해박해 순교자 (중)

3. 기해박해 순교자 (하)

4. 병오ㆍ병인박해 순교자

 


이호영·소사 남매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과부가 돼 집으로 돌아온 누나 이소사는 어머니와 동생 이호영과 함께 입교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부친이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남매는 서울로 이사했고, 동생 호영은 중국인 여항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돼 교우들을 돌봤다.
 

남매는 1835년 2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체포됐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참아냈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남매는 4년을 옥에 갇혀 지내며 한날한시에 함께 순교하자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동생 이호영은 긴 옥살이로 얻은 병으로 1838년에 전옥서에서 먼저 순교했다. 누나 이소사는 동생이 옥사한 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됐다. 동생의 나이 36세, 누나는 56세였다. 한날한시에 순교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핏줄과 신앙으로 맺어진 진정한 남매였다.

 

이광헌은 청년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다 천주교를 알게 돼 부인 권희와 함께 입교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회장으로 임명됐다. 권희는 회장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를 집으로 맞이해 신자들의 미사 참여를 도왔다.
 

1839년 가족이 함께 체포돼 이광헌은 5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가족 중 가장 먼저 순교했다. 부인 권희는 혹독한 옥살이 끝에 9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남편을 따라 순교했다.
 

신심 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딸 이 아가타 역시 부모의 길을 따라갔다. 동정녀인 그는 포청옥에서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격려하며 신앙을 지켰다. 9개월간의 옥살이 후 이 아가타는 1840년 1월 9일 포청옥에서 김 데레사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이광헌의 동생 광렬도 신심에 있어선 형 못지 않았다. 22세 때 형의 가족과 함께 입교한 그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정하상과 함께 두 차례 북경을 왕래했다. 북경에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그는 동정을 결심하고 평생 혼자 살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 역시 1839년 체포되어 그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박희순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쯤에 천주교를 알게 돼 입교했으나 궁녀 신분으로 신앙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 조카 집에 살면서 언니 박큰아기와 조카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밀고로 조카 가족과 함께 체포된 그는 많은 이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지만, 언니 박큰아기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는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을 권면하는 편지를 써 신자들을 감동하게 했다. 열정적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언니 박큰아기 역시 동생이 순교한 지 100여 일이 지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했던 남명혁은 입교 후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여항덕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돼 여 신부를 보좌하며 신심 운동을 일으켰다. 부인 이연희는 남편을 도와 공소를 세우고 예비신자와 신자들을 가르치는 등 교회 일에 헌신했다.
 

남명혁은 1839년 가족과 체포됐다. 남명혁은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부인 이연희 역시 고문을 이겨내고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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