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행복론은 듣기에 따라 억지스러운데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
저의 행복론은 억지스럽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우선 행복 의지가 있습니다.
물 반 잔에 행복한 사람이 있고, 같은 물 반 잔인데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저는 물 반 잔이 아니라 바닥에 조금밖에 물이 없고,
아예 빈 잔일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 의지에는 우리 인간이 너무도 쉽게 불행해져버리는데
그렇게 인생을 망쳐버리는 멍청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겁니다.
또 저의 행복론에는 나의 행복이
남이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무조건>이라는 말은 <조건이 없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저의 행복에는 조건이 없다는 뜻이요, 가난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겁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해지는 행복은
돈이라는 조건에 의해 좌우되고 쉽게 깨지기에
돈이 없어도 행복하고 있으면 더 행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것만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것이 더 훌륭한 가난이고
그래서 돈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조건이 없는 사람이
두루 가난하고 두루 행복한 사람이고 주님의 행복 선언에 맞는 사람입니다.
무조건 행복한 사람은 또한 무조건 사랑합니다.
내가 내건 조건에 합당한 사람이라야 사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워한다면 그만큼 불완전하고 깨지기 쉬운 사랑이지요.
고백성사를 주다보면 자주 그 사람이 이러이러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함으로써 자기 사랑의 조건이 그에게 달렸다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 경우
저는 당신 사랑의 주도권이 당신에게 없고 상대방에게 있는 거라고,
당신 사랑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뺏긴 거라고 신랄하게 얘기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훌륭하건 그렇지 않건 무조건 사랑해야만
그 사랑이 완전하고 상대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어 무조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오늘 주님처럼 간음한 여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죄지은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랑하시는 주님은 죄를 지었어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그래서 어떤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며,
죄 지은 사람이 누구든 그러니까 나든 남이든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죄 지은 사람은 남을 죽이기에 앞서 자신을 죽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죄 지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자신을 죽이고 싶은데
마침 화살을 돌릴 수 있는 죄인이 자기 앞에 나타나자
얼른 그 화살을 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죽이려던 나의 생명을 연장시켰는데
사실은 나든 남이든 과거의 죄 때문에 미래 생명까지 끊어서는 안 되지요.
나든 남이든 지금까지 죄를 지었어도 앞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되는 건데
과거의 죄에 존재를 묶어버림으로써 미래를 향해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죄를 죽이고 존재는 살면 되는데
죄는 놔두고 존재를 죽이는 짓을 종종 하는 우리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오늘 우리는 아파하며
모든 인생을 무조건 사랑하고 용서해야겠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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