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에 누가 저의 이웃이냐고 바리사가 질문을 하고 이에 주님께서 정의를 내려주시는 말씀으로 되어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전의 정의는 '인접하여 가까이 있는 집이나 지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정의일뿐이고 그리스도교적이고 영적인 정의는 역시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정의입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 인접하여 있고 가까이 있어도
물건을 이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소에게 닭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에게 개도 이웃이 아닙니다. 이렇게 제가 말하니 요즘은 개를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며 요즘 어쩌면 진정한 이웃은 개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감정적인 가까움이나 심리적인 가까움으로 치면
분명 내가 키우는 개가 제일 가까울 겁니다. 애착관계나 관심의 정도로 얘기하면
분명 개가 만정이 떨어지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관심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개가 나의 이웃이라는 것에는 '그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있고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개가 더 나의 이웃이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웃이 없는 우리에게 이웃이 있기를 바라는 반증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는 이웃을 바라는 우리에게 이웃 대체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개가 우리의 이웃 대체제가 된 것이 바로 쉬운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고 싶은데 너무 어려운 사랑은 싫고 쉬운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고 부담이 되거나 고통을 감수하거나 어떤 희생까지 해야하는 것은 싫은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개보다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삼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이웃은 참이웃이 아니라고 고통이나 희생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고
참사랑이 없는 이웃은 참이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듯 고통과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라 감성적인 사랑이고 감성적인 사랑이란 좋은 감정의 연장 또는 확대일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고
좋아하는 것이 바뀌면 싫어지고 미워지는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사랑이란 좋고싫은 것을 초월하는 것이고 싫은 것을 하기에 내가 고통스러울 때
오히려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약한 불은 한 움큼의 물에 꺼지지만
이미 커질대로 커진 큰 불은 웬만한 물로는 끌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화염을 키우는 것과 같이 참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하고 싶고
하지 못하게 할 때 사랑이 더 간절해집니다. 정말 가고 싶은 사람은 가지 못하게 붙잡을수록 갈망이 더 커지고 뿌리치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붙잡아도 가듯이 우리의 사랑도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어도
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하고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힘이 있게 됩니까? 어떻게 생깁니다까? 음식을 먹고 힘을 쓰지 않으면 음식은 살이 되고 힘이 되지 않듯 반대로 음식을 먹고 힘을 써야 음식이 힘이 되듯 우리의 사랑도 부모의 사랑이든 하느님의 사랑이든 섭취하는 사랑이 있어야 하지만 사랑을 해야 사랑이 비만이 되지 않고 사랑에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먹기만 하고 힘을 쓰지 않아
섭취한 영양분이 자기 안에 쌓인 것이 비만이듯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받은 사랑을
자기 안에만 쌓아두고 실천치 않은 것이 사랑비만입니다. 신명기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복음의 주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두 차례나 말씀하시듯 이웃사랑이 실천될 때 이웃도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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