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니다” 하고 끝까지 의탁하는 모습을 보이신다. 그림은 예루살렘 예수무덤성당 안에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모습을 그린 벽화. 가톨릭평화신문 DB |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숨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돌무덤에 묻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나셨다’(루카 2,11 참조)는 그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으셨습니다.
숨을 거두시다(23,44-49)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입니다. 해가 어두워진 것입니다. 이 어둠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됩니다. 세 시가 되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신 다음에 숨을 거두십니다.(23,44-46)
대낮인데도 갑자기 사방에 진한 어둠이 깔리는 것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일 수 있습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도 지중해에 열풍이 불어오면 진한 구름이 해를 가려 일시적으로 어둠이 깔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개입하신 것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는 천사들이 나타나고 한 밤인데도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었지만 (루카2,8-9), 예수님의 죽음에는 반대로 온 땅에 어둠이 깔린 것입니다. 성전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이 지은 성전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제 인간은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언제였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아침 아홉 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두 6시간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로 고통을 당하시다가 최후를 맞이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아버지께 맡겨드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께 맡깁니다.”(23,46)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하고 말하였고, 구경하러 모여 있던 군중들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23,47-48) ‘의로운 분’이라는 표현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는데,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켜본 백인대장이 이를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군중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는 것 역시 예수님의 무죄함을 군중들도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이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는 구절로 이 대목을 마무리합니다.(23,49) 예수님의 친지는 친척뿐 아니라 열두 제자는 물론 그 밖의 다른 제자들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루카는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여기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서는 이미 8장 2-3절에서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을 거명합니다.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등입니다.
묻히시다(23,50-56)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찬동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최고의회 의원이었지만 “착하고 의로운 이”로서 최고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루카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합니다.(23,50-51)
아리마태아는 구약성경 사무엘기 상권 1장 1절에 나오는 지명 ‘라마타임’, 1장 19절에 나오는 ‘라마’와 같은 곳으로 예언자 사무엘이 태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라마는 언덕을, 라마타임은 두 언덕을 뜻한다고 하지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활동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관심을 기울여 지켜보았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청해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 곧 돌무덤에 모십니다. 그 무덤은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으로 요셉이 자기 자신이나 집안사람을 위해 준비해 놓은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23,52-53)
루카 복음사가는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고 전합니다.(23,54) 준비일이었다는 것은 안식일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전날에 미리 준비해 놓는다고 해서 부르는 것으로, 안식일 전날을 가리킵니다. 또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라는 것은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되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르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고 무덤에 모시기까지 바쁘게 움직였음을 시사합니다. 유다인들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쉽니다.(23,55-56)
이 여인들은 이미 갈릴래아에서부터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돕던 이들이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자신들이 극진히 시중들며 따랐던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만 싸서 모신 것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더 정성스럽게 모시기 위해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지만,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안식일 계명을 따라 쉬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31편 6절을 인용한 이 말씀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루카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잉태 때부터 유년 시절, 그리고 공생활 중에는 물론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께 의탁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어머니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함으로써(루카 1,38) 가능했습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이 애타게 찾았다는 말에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루카 2,49) 공생활 중에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즐거하십니다.(루카 10,21)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단말마의 고통 중에서 “제 영을 아버지께 맡겨드립니다” 하고 한결같은 신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이런 한결같은 의탁과 신뢰가 아닐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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