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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예수님이야기

(44) 기도(루카 11,1-13)

by 세포네 2017. 12. 24.

주님을 모신다 말하면서 표징은 입맛대로 청해

 

▲ 고래에게 삼켜지는 요나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출처=가톨릭 굿뉴스


루카 복음서의 문맥상 이번 호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난 호에서 본 내용(루카 11,14-28)과 이어집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요나의 표징(루카 11,29-32)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에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더러는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했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11,14-16)
 

예수님께서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비난과 관련해서는 예를 들며 구체적으로 대응하셨습니다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시고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십니다.(11,17- 23 참조)
 

그런데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와 관련한 구체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 답변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먼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비판하십니다.(11,29)  왜 “이 세대가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지난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도, 곧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표징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표징만을 예수님께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11,29-30)
 

요나는 구약의 예언자입니다. 요나는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주민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만, 그 분부를 피해 ‘땅끝’을 상징하는 타르시스라는 곳을 향해 배를 타고 달아납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고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 속에 내던져진 요나는 커다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다가 나와 다시 하느님의 분부를 듣고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요나의 말에 회개해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지요.(요나 1─4장 참조)
 

이런 요나서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징’을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의 회개 선포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한 것입니다. 따라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요나가 회개(또는 회개 선포)의 표징이 됐듯이, 예수님 자신이 이 사악한 세대에 요나와 같은 표징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사흘 동안 땅 속에서 지내시리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루카 복음사가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이는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에 상징적으로 비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대를 사악한 세대라고 하신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고 니네베 사람들이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 땅끝에서 왔고,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솔로몬보다 또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11,31-32)
 

이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온 남방 여왕과 달리, 또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달리 이 세대는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단죄를 받을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자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방 여왕은 솔로몬 치세 때에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을 말합니다.(1열왕 10,1-13 참조) 학자들은 스바가 기원전 900~450년쯤 인도와 교역을 통해 전성기를 맞은 아라비아 남쪽의 스바 왕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는 또 옛 에티오피아인 아비시니아와 무슬림 전승에도 나오며,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여왕의 이름은 발키스였다고 합니다.(「주석 성경」 열왕기 상권 10장 주석 참조) 
 

니네베는 고대 앗시리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서에 따르면 니네베는 성읍을 가로질러 가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고, 주민이 12만 명이나 되는 큰 성읍이었습니다.(요나 3,3; 4,11 참조) 기원전 8세기 초부터 7세기 초까지 번성했던 옛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 몰락하고 맙니다. 오늘날 이슬람국가(IS)에 의해 황폐화한 이라크 북부 모술 인근 니네베 평원 지역에 위치해 있지요.

 

눈은 몸의 등불(11,33-36)

이어 예수님은 지극히 상식적인 그러나 그 뜻을 바로 파악하기에는 쉽지 않은 말씀을 연이어 하시는 것으로 루카는 기록합니다. 첫째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11,33)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덮어 두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한 상식입니다. 왜 이런 상식적인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등불’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요나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등불이 가리키는 표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을 덮어 두지 않듯이 등불이신 예수님, 빛이신 예수님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등불로, 빛으로 여기면서도 그 등불을 다른 것으로 가려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습니까?
 

둘째 말씀은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이 환하지만, 성하지 못할 때에는 온몸도 어둡다’는 것입니다.(11,34) 하지만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이어오는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11,35-36)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말씀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등불은 바로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면,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11,28 참조) 우리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몸이 환히 빛을 내지 못하고 어둡다면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님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 신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표징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기를 주님께 요구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또 주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공명심과 이기심으로 참 빛이신 주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루를 마치면서 적어도 잠깐이라도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 11,35)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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