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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클래식산책

로시니 / '비단 사다리' 중 서곡

by 세포네 2014. 1. 26.

Overture to "La scala di Seta"
로시니 / 비단사다리 서곡
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 



Christian Benda conducts the Prague Sinfonia Orchestra
Ravenna - Teatro Alighieri

서곡(Overture)
주젭페 포파의 대본에 의한 작은 희가극으로 1812년에 작곡되고 같은 해 5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다. 줄거리는 두 쌍의 연인들이 후견인의 농간으로 각기 다른 상대와 결혼할 뻔하다가 밀회 때 사용한 명주 사다리로 해서 서로 제 짝을 찾아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 오페라는 오늘날 별로 공연되지 않지만 서곡만은 자주 연주된다.

(곡 해설)
1812년 5월, 밀라노에서 초연한 1막으로 된 이 오페렛타는 오늘에 와서는 전혀 상연되지 않지만 서곡은 아름답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서곡은 이 오페라에 알맞게 경쾌하고 아름다운데 간단한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발랄한 선율미는 그의 서곡중에서도 뛰어났다고 하겠으며 악기의 취급에 있어서 특히 목관의 고상하고 요염한 표정은 일품이다. 먼저 안단테로 시작되다가 빠른 알레그로의 주부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서주에 있어서나 주부에 있어서의 제1테마도 기본적인 모티브는 하행하는 음계의 모티브로 구성되어 제2테마 도입의 악절은 반음계를 섞어 상행하는 음계의 모티브이다. G장조의 제2테마도 음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사다리와 관계있는 구체적인 수법이다. 코다에 이르러 고조된다.

(오페렛타 줄거리)
후견인 도르몬은 줄리아를 브란삭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는데, 줄리아는 돌빌이라는사나이와 사랑하여 내통하고 있다. 한편, 브란삭 또한 줄리아와는 사촌 누이 동생인 리칠라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줄리아는 어떤 날 밤 창으로부터 비단으로 만든 사다리를 내려 돌빌과 밀회를 하려한 즉, 줄리아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는 젤마노라는 사탄에게 그 사다리가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그 사다리가 브란삭을 위해 내려진 것으로 혼자 생각한다. 브란삭 자신은 자기를 위해 가설한 것으로 생각하여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리칠라도 브란사와의 밀회라고 오해하여 숨어서 지켜본다. 시간이 되어 돌빌이 나타나 소리를 내자 도르몬은 놀라서 사다리를 발견하고 큰 소동이 일어나는데, 숨어있던 사람들이 나타나자 각자의 입장이 명백해진다. 결국 브락삭과 리칠라의 결혼으로 경사스럽게 끝난다는 줄거리로 되어있다.

로시니 Gioacchino Rossini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아드리아 해에 면한 소도시 페사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발휘한 로시니는, 1802년에 집안이 아버지의 고향 루고로 이사를 간 뒤 그 도시의 성직자 주세페 말레르비에게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1804년에 양친은 정주할 생각으로 볼로냐로 옮겼으며, 거기서는 안젤로 테세이에게 노래와 화성학을 사사하고, 13세 경에는 훌륭한 보이 소프라노로 통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14세를 막 지난 나이로 이례적인 일이지만,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1806년의 일인데, 그해에는 또 시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이듬해부터는 원장 마테이에게 대위법을 배운다. 이윽고 실제로 작품을 쓰게 되는데, 이 학생 시대에는 몇 개의 성악곡, 종교곡, 기악곡 외에 5곡의 현악 4중주곡과 6곡의 현악을 위한 소나타 등이 있다.
1810년 로시니는 음악원을 졸업하고 오페라 작곡가로 출발한다. 그해 가을 흥행사 카발리를 통해 베네치아의 산 모이제 극장으로부터 파르사(1막짜리 경가극)를 의뢰 받고 '결혼 어음-La cambiale di matrimonio'을 작곡한다. 이듬해에는 콜소 극장의 의뢰로 '터무니없는 오해-L'equivoco stravagante'를 쓰고 오페라 작곡가로서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지만, 이 오페라는 대본이 너무 치졸해서 상연은 실패로 끝났다. 1812년에는 다시 산 모이제 극장에서 파르사 '행복한 착각-L'inganno felice'을 상연, 이것이 최초의 성공작이 된다. 그 후 페라라에서 '비단 사다리-La scala di seta'를 상연했으나 이것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데뷔하여 발표한 '시금석-La pietra del paragone'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 문에 그는 밀라노 프랑스 장군의 배려로 병역까지 면제되었다. 그리고 그 성공에 의해 산 모이제 극장으로부터 파르사 2곡을 의뢰 받고 '도둑의 찬스-L'occasione fa il ladro, ossia Ilcambio della valigia'와 '브루스키노 씨-Il Signor Bruschino, ossia Il figlio per azzardo'를 작곡한다. 이듬해 1813년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탄크레디-Tancredi'를 상연한다. 이는 로시니로서는 처음으로 상연된 오페라 세리아였으며, 베네치아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어《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L'Italiana in Algeri》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81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는 밀라노에 체류하면서 스칼라극장을 위해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Aureliano in Palmira' 와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을 작곡하여 상연, 또 1814년에는 베네치아에서 '시지스몬도-Sigismondo'를 발표하고 나서 볼로냐로 돌아 간다.
1815년 이미 유명해져 있었던 로시니는 나폴리에 가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로 성공하지만, 나폴리 음악하교 교장을 지내던 작곡가 칭가렐리나 당시의 오페라 부파 대가 파이젤로는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듬해 로마의 아르헨티나 극장에서 '세빌랴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 (처음 제목은 '알마비바'또는 '쓸데없는 조심')를 상연한다. 그러나 이는 1782년 이미 동명의 오페라가 파이젤로에 의해 작곡되어 있었기 때문에 파이젤로 일파의 방해로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상연 횟수를 거듭 할 때마다 진가를 인정받게 되어 얼마 후, 유럽 전토에 로시니의 이름을 떨치는 바가 되었다.
1816년에는 나폴리에 돌아가 '신문'으로 대실패를 경험하지만, 직후에 '오텔로-Otello'를 작곡하여 그것은 성공한다. 그해 연말에 다시 로마에 가서 '체네렌톨라'를 작곡하여 이듬해 초에 초연하고 또 실패하나, 이는 후에 평판을 되찾는다. 그후 국내 각지의 오페라 극장을 위해 십 수곡의 오페라를 작곡하는데, 그 속에는 1817년의'도둑까치-La gazza ladra', '아르미다-Armida', 1818년의 '이집트의 모세-Mose in E햣새', 1819년의 '호수 위의 미녀-La donna del lago', 1820년의 '마호메트 2세-Maometto II'등이 있다.
1822년 3월 볼로냐로 돌아간 로시니는 지금까지 그의 오페라에 종종 출연하고 있었던 스페인 가수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한다. 그 해에 로시니는 빈을 방문, 쾰른트나트아 극장에서 이미 만든 오페라를 잇따라 상연하고 인기를 모았다. 이때 빈에는 베버도 와서 '마탄의 사수'를 상연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인기는 로시니에게 쏠렸으므로 베버가 질투했다고 전해진다. 또 로시니는 빈 체류 중에 베토벤의 작품을 듣고 감격하여 만년의 베토벤 댁을 방문하고 있다. 그는 베토벤의 곤궁함을 보고 구원 모금을 계획했으나 찬동자가 없어서 이는 실패했다. 이윽고 볼로냐에 돌아간 로시니는 1823년에는 베네치아에서 '세미라미데-Semiramide'를 초연 한다. 이는 로시니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극장을 위해서 쓴 마지막 오페라가 되었다. 이때 로시니는 아직 31세였으나 그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의 초연에 응해 파리를 거쳐 런던에 건너가 1824년에 '젤미라'를 상연한다. 그해 여름에는 영국을 떠나, 주영 프랑스 대사를 통해 얘기가 되었던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 음악 감독으로 취임한다. 거기서는 아직 파리에서 발표하지 않은 오페라를 상연하고 1825년에는 샤를 10세의 대관을 축하하여 극적 칸타타 '랭스 여행-Il viaggio a Reims'을 작고, 그것에 의해 '국왕의 제1작곡가', '프랑스 성악 총감독' 칭호를 받았다. 그후 1826년에는 '마레트 2세'를 개작한 '코린트의 포위-Le Si ge de Corinthe', 그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모세'를 개작한 '모세와 파라오-Mose et Pharaon'를 발표한다. 다시 1828년의 '오리 백작-Le Comte Ory'에 이어 이듬해의 '빌헬름 텔-Guillaume Tell'로 결정적인 대성공을 거두고 빈의 대비평가 한슬릭에 의해 "오페라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그후는 작품 수가 적고 물론 오페라는 1곡도 쓰지 않았는데,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탈리아 극장 음악 감독으로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리에 갔으며, 그밖에 마드리드, 엑스레 방, 벨기에, 독일 등지를 여행했다. 1836년 로시니는 파리에서 당시 그의 호적수로서 나타난 마이어베어의 '위그노 교도'가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이와 같은 오페라가 인기를 끄는 것에 반발, 또 건강상의 이유도 있어서 이제 오페라 작곡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40대 중반이라는 나이로 오페라계에서 은퇴한 로시니는 1837년 이사벨라와 이혼한다. 1839년에는 모교인 볼로냐 시립 음악원의 명예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841년에는 9년 전에 작곡하기 시작했던 '스타바트 마테르'를 개정 완성하고, 그 이듬해에 파리에서, 그리고 이어서 볼로냐에서 발표했다. 1843년 병상이 악화하여 파리에서 수술을 받는다. 1845년 이사벨라가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일찍이 엑스레 방에서 알게 되었던 오랑프 페리쉐와 결혼한다. 그후 피렌체로 이주, 1855년에는 병상이 악화하여 다시 파리에서 산다. 파리 근교 파시에 있는 별장에는 그의 명성을 흠모하여 유명한 화가와 문필가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소장엄 미사곡'등 소수의 작품이 작곡된 바 있다. 1868년 오랑프의 간병 속에 11월 13일 로시니는 그 생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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