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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술파는 신부, 단내나는 삶 “위하여!”/ 삶이 보이는 창...

by 세포네 2008. 11. 9.

술파는 신부, 단내나는 삶 “위하여!”

 

수사와 함께 시중 드는 생맥주집 ‘삶이 보이는 창’

 

삶창에서 손님 테이블에 안주를 나르는 김정대 신부.
김 신부의 서빙을 받으면 손님들은 더 술맛이 난다며 좋아한다 .

 

지난 13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396의6 2층.

“여기여, 아저씨! 호프 2000이요.”

“예~. 곧 가겠습니다.”

밤 8시가 넘자 손님들이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하철 1호선 동암역에서 5분 거리여서 부평과 주안공단, 남동공단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쉬어가기엔 안성맞춤인 곳. 노동자들 뿐 아니라 인천지역 엔지오 활동가들이나 봉사자들이 주로 찾는 이곳 ‘삶이 보이는 창’을 단골들은 ‘삶창’이라고 부른다.

삶창에 가면 가톨릭 신부와 수사가 서빙을 한다. 사람 대접 못 받는 이들을 귀한 손님으로 모시며, 함께 어울리기 위해 김정대(44) 신부가 삶창을 연지 벌써 2년. 이제 술집 아저씨가 다 된 듯 김 신부는 거품 하나 없이 생맥주를 뽑아낸다. 솜씨가 일품이다. 그러나 주방장인 김성자 마리아(47)씨가 보기엔 여전히 요령 없긴 마찬가지다. 거품도 조금 포함시켜야지, 저렇게 따라줘서 뭐가 남겠냐는 것이다. 생맥주야 그렇다 치자. 노동자들이 와서 소주만 시켜놓고 술을 마시고 있으면, “저렇게 깡술 마시면 속 다 버린다”면서 시키지도 않은 안주를 가져다준다.

“신부님이 저렇게 주책 없이 서비스만 갖다 주니, 어떻게 장사가 되겠어요?”

마리아씨의 면박 아닌 면박에 김 신부는 머리만 긁적인다.

“그래도 신부님은 오뎅탕도 끓일 줄 알고, 두부탕도 할 줄 알지. 범생이 수사님은 라면 밖에 끓일 줄 아는 게 없으면서 공부나 하실 것이지, 뭘 한다고 술집엔 와서 고생인가 몰라.”

“마리아님, 저 한치도 잘 굽잖아요.”

이진현(34) 수사가 마리아씨에게 항변하려다 말고 주문을 하기 위해 쳐다보는 손님에게 날래게 달려갔다.

“지금은 웨이터 다 됐어요. 처음엔 눈치 코치가 하나도 없더니.” 앞에선 면박도 서슴지 않던 마리아씨는 김 신부와 이 수사가 안주를 들고 손님 테이블로 들고 가자 “그래도 우리 신부님, 수사님 얼마나 정이 많은데요”라고 자랑한다. 그런 마리아씨는 소아마비로 오른손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 손만으로 하는 손놀림이 두 손 가진 사람 못지 않다. 로만칼라를 감춘 신부와 수사가 웨이터 못지않게 서빙을 하는 것처럼. 안주를 들고 간 김 신부와 이 수사는 아예 손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온종일 삶터에서 목구멍에 단내가 나게 일하고 온 손님들에게 김 신부는 술을 권하고, 이 수사는 손님의 추임새까지 넣으며 흥을 돋운다. “브라보.” 성당의 높은 제단에 계셔야 할 신부님과 고상하신 수사님이 술 시중을 들고 말상대를 해주자 활기가 돌아온 손님이 김 신부와 이 수사에게 건배를 제안한다. 오늘도 삶창의 밤이 심상치 않을 모양이다.

 

수사와 신부가 함께 시중 드는 생맥줏집 ‘삶이 보이는 창’ 에서
김정대신부가 손님이 주문한 안주를 나르고 있다.

 

“술 되고 안주 되어 ‘사람’ 대접합니다”

김정대 신부가 ‘삶창’ 차린 이유 ‘먹물들’에겐 신앙과 지식도 관념적으로 흐르기 쉽다. 좀 더 나은 위치에 서서 베푸는 것엔 익숙하지만, 계급장 떼고 하나가 되는 것엔 아연 실색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어떤 성직보다도 ‘권위 있는’사제에게 그것은 더욱더 어려운 시험으로 보인다. 삶창의 김정대 신부가 이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호프처럼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 신부의 그런 도전은 삶창이 처음은 아니다. 예수회에 입회해 수도원에서 수련을 마친 다음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간사로 활동하던 그는 1994년 10월 ‘특별한 체험’을 시작한다. 서울 영등포 문래동의 한 공장에서 일한 것이다. 스테인리스 원판에 광을 내는 노동은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피곤으로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함께 일하던 공장노동자 8명과 함께 때론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방에서 <남행열차>를 부르며 어울렸다. 그가 6개월 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아무에게도 그의 신분을 말하지 않은 위장 취업이었다. 하지만 이 체험이야말로 계급장이란 위장에서 벗어나 그가 진정으로 사람들과 어울릴 용기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김 신부가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8~89년 2년 간 인천 부평공단의 반도체부품회사의 엔지니어로 일할 때였다. 그는 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던 관리직급이었지만, 공장에서 노조가 파업할 때 구사대가 되어 주리라던 사용주의 기대와 달리 노조원들의 동조 파업에 나섰다. 그로 인해 한 달간 출근 정지를 당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일을 계기로 삶에 대해 고뇌하다 1990년 2월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어쩌다 술집아저씨가 될 생각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가 1996년부터 5년간 호주에서 예수회 신학원을 다닐 때였다. 멜버른에서 1천㎞ 떨어진 아델레이드에 있는 예수회본당공동체를 찾았을 때 주방에서 한 남자가 요리를 하며 손님들에게 직접 서빙을 해주었다. 김 신부도 대접을 잘 받았다. 나중에 방에 들어가 회원명부를 펼쳐 이름을 살펴보니 서빙한 남자가 바로 공동체원장이었다. 멜버른 외곽의 타라와라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해 며칠 묵었을 때도 수도원장으로부터 직접 그런 서빙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제로서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헌신적인 그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김 신부는 자신도 사제가 되면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12년 전 위장취업 ‘낮은 곳’ 체험
호주서 서빙하는 사제들에 감명
적자 나도 ‘잔치’는 오늘도 계속
더구나 그가 성서에서 만난 예수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수는 늘 사람들과 테이블에서 음식과 술을 나누었다. 예수가 최초로 보인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이었고, ’최후의 만찬’ 때도 테이블에서 술을 나누었다. 예수는 그래서 ‘술주정뱅이’라는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늘 사람들과 먹고 마시며 ‘함께’했다. 그랬기에 김 신부는 호주에서 본 본당공동체와 수도원 원장님의 서빙이 바로 인간을 대하는 ‘하느님의 환대’와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다. 동료 사제들이 미사에서 포도주와 미사를 나눌 때, 그는 이곳서 생맥주와 안주를 나른다. 그리고 때론 자신이 술이 되고 안주감이 된다. 성당에선 세례교인만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이곳에선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의 서비스가 지나친 때문인지, 손님들이 너무 짠 때문인지 그와 이 수사가 받는 월급이라곤 50만원 밖에 안 되는데도, 1년이면 1천만원 가량이 적자다. 적자는 그가 외부에 강연을 해 번 돈과 몇몇 회원들이 보태주는 후원비로 채운다. 그래도 삶창의 잔치는 오늘도 계속된다.

 


이웃의 아픔까지 담아 “건배!”
스스로 낮아진 단골손님들 “다음엔 뭘 시킬까. 김치찌개로 할까, 두부탕으로 할까. 신부님이 만들어주는 건 뭐든 맛있다니깐.”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의 칭송에 <공동선> 전 편집장인 한상봉씨가 “(삶창에 대한)사랑에 눈먼 사람이 뭔들 안 맛있겠냐”고 한다. 13일 밤 주방 앞 테이블이 단골손님들로 시끌벅적하다. 모두 인천 사람들이다. 주안노동자센터 센터장인 박북실수녀, 노동현장에 있다가 실무자로 박 수녀를 돕고 있는 백영주 간사, 가톨릭 인천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이대원 사무국장에다 인근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민들레국수집을 꾸려가고 있는 ‘전직 수사’인 서영남씨까지 함께 했다. 하나 같이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조용하기만 했던 형님이 이렇게 살 줄 몰랐어요. 앞에 나서던 애들은 다 증권회사 같은데 다니는데.” 서강대 재학시절 김 신부의 가톨릭학생회 후배였던 한씨의 말이다. 늘 조용하기만 했던 김 신부가 수도원에 들어간 뒤 ‘위장취업’까지 경험하고 이렇게 살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이 노동자들에게 곧바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저도 수련 초기 공장 실습을 나가서 노동자들에게 충고를 했다가 한 여성 노동자가 ‘수사님이 다시 이곳에 올 사람이냐’고 항변하자 할 말이 없더라고요.” 박 소장은 “상처를 많이 받게 되면, 이 사람이 내 사람인지 끝없이 실험하고, 그 실험이 끝난 뒤에야 상대를 받아들이고 자신도 변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5년째 다닌 청송감호소 장기수들에게 다음날 새벽 4시 면회를 간다는 서영남씨는 “처음엔 긴가민가하며 쭈뼛쭈뼛하기만 하던 장기수들이 10년 넘게 만나니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더라”고 했다. “<성서>에도 보면 경제적 기득권에 도덕적 기득권마저 가진 바리새인들은 소외된 이들의 거친 모습을 이해하기보다는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려 했어요.” 이 수사의 말과 함께 다시 잔을 잡은 건배잔 속엔 이들이 심판하기보다 늘 함께하고픈 사람들의 아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사와 신부가 함께 시중 드는 생맥줏집 ‘삶이 보이는 창’ 에서 김정대신부가 손님이 주문한 안주를 나르고 있다.

 

산재상담도 하고 해고자 한숨도 듣고 속풀이 일상 풍경 /

자정 무렵이 돼 이제 막 주민등록증을 만들었을 법한 세 여성이 들어선다. “오빠!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미안해서 어떡해요.” 이 수사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혹여 수사님 채갈까 두려운 마리아씨가 주방에서 “아가씨들! 오빠라니, 수사님이야”라고 한다. 그리고 수사가 뭔지도 모르는 아가씨들에게 수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준다. 전남 진도에서 같은 고교를 졸업한 이들은 용역회사의 파견 비정규직으로 전자제품 부품회사에서 일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일하다 쓰러져 병원에 가보니 뇌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단다. 공장에 그 얘기를 했더니 “당장에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수사가 “산재 보상 문의도 안 해봤느냐”고 하자, 이들은 “산재가 뭐냐”고 되묻는다. 일하다 업무로 인해 병이 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에 이들은 “그런 게 있느냐”며 놀란 표정이다. 멀리서 이들을 보던 김 신부가 다가와 노동사목 연락처를 알려주며 상담을 해보라고 친절히 가르쳐준다. 이어 해고된 한 노동자가 앞서 해고된 선배 언니와 함께 삶창을 찾았다. 한숨을 푹푹 쉬며 술을 들이 붇는다. 김 신부가 무료 서비스로 어묵탕을 내놓았지만, 이들은 어묵탕도 아까운 듯 잘 먹지 않고 금세 소주 5명을 비운다. “언니, 정말 윤락업소에 갈 생각까지 했다니까. 눈 딱 감고 일 저지르려고도 했어.” 이때 김 신부와 이 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식어버린 어묵탕을 데워주는 것 뿐이다.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속울음을 터트렸다. 7년 전 한 백화점 매장에서 근무할 때였다. 엄마와 함께 온 어린 아이가 너무 예뻐 살짝 머리를 쓰다듬었더니 그 엄마가 “추한 년”이라고 하자, ’무시당했다’는 깊은 상처로 7년 동안 속앓이를 해온 것이다. 삶창에서는 단골들이 모여 판소리 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결혼 피로연이 열리기도 한다. 뒤풀이를 하며 그저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김 신부와 이 수사에게 주방 아주머니는 “부럽지요?”라며 떠본다. 그러면 마치 독신수도자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신부의 선배 언니가 뼈 있는 말을 새신부에게 한다. “지금은 좋아 죽겠지? 3년 안에 미워 죽을 거다!” 김 신부와 이 수사의 서비스로 매일 밤 열리는 ‘삶이 보이는 창’의 풍경들이다.

 

인천지역 엔지오와 노동단체들에게 삶창은 정보 교류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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