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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2월 23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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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팍토르(12.23)

신분 : 수사

연대 : 1520-1583년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의 부친은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살고 결혼하였지만, 사실은 시칠리아(Sicilia) 태생의 양복 기술자였다. 그의 아들 베드로 니콜라우스는 신심이 깊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나, 15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은 아들 역시 양복 일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콜라우스는 수도생활의 성소를 인식했기 때문에 부친의 동의를 얻어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 급성장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해외 선교를 요청하였으나, 그에게는 무어인의 개종 업무만 주어졌다. 만년에 그는 카푸친회로 이적했지만 불과 몇 달 뒤에 되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참으로 거룩한 이 사람들을 떠날 수 없어…” 그는 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꼭 보속을 한번 하였고, 설교 전에는 세 번씩 육체적인 고행을 하였다. 탈혼, 기적 그리고 환시는 그에게 흔한 일이라 할 정도로 많았다.

   성 루도비쿠스 베르트란두스(Ludovicus Bertrandus, 10월 9일)는 그를 '지상과 천국에서 동시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그는 에스파냐 국왕인 필립 2세의 극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며, 신적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서 찬물도 곧 더운 물로 변화시킬 정도였다고 흔히들 말을 한다. 그러나 사탄이 사자, 곰, 뱀 같은 행태로 그에게 공격한 사례들도 있다는 것이다.

 

 

다고베르트 2세(12.23)

신분 : 왕, 순교자

연대 : 679년

지역 : 아우스트라시아

 

   프랑스의 두 교구는 성 지그베르트 3세(Sigebert III, 2월 1일) 왕의 아들인 성 다고베르트 2세의 축일을 성대히 지낸다. 사람들은 그가 순교자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가 656년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관을 물려받았을 때에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어린 왕은 그의 후견인이던 그리모알드로부터 축출되었고, 푸아티에(Poitiers)의 주교인 디도(Dido)에 의하여 아일랜드로 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행적은 불확실하지만 순교한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온 것을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레오메네(12.23)

바실리데(12.23)

사투르니노(12.23)

아가토포(12.23)

에바리스토(12.23)

에우니치아노(12.23)

에우포로(12.23)

제시코(12.23)

젤라시오(12.23)

테오둘로(12.23)

신분 : 순교자

연대 : 250년

 

성 테오둘루스(Theodulus)와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에우포루스(Euporus), 성 젤라시우스(Gelasius), 성 에우니키아누스(Eunicianus), 성 제티쿠스(Zeticus), 성 레오메네, 성 아가토푸스(Agathopus), 성 바실리데(Basilides), 성 에바리스투스(Evaristus)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크레타(Creta) 섬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크레타의 열 명의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레오메네는 클레오메네(Cleomenes)로도 불린다.

 

마르도니오(12.23)

미그도니오(12.23)

신분 : 순교자

연대 : 303년

 

 성 미그도니우스(Migdonius)와 성 마르도니우스(또는 마르도니오)는 로마제국 왕실의 관리였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발발했을 때 신앙을 포기하라는 강요를 거부하고 순교하였다. 성 미그도니우스는 화형을 당했고, 성 마르도니우스는 우물에 던져 넣는 익사형을 받았다.

 

마리아 마르가리타(12.23)

 

신분 : 과부, 설립자

연대 : 1701-1771년

지역 : 카나다

 

  캐나다 퀘벡(Quebec)주 몬트리올(Montreal) 교외 바렌(Varennes) 태생인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두비유(Maria Margarita D'Youville, 또는 Maria Margarita Dufrost de Lajemmerais)는 1722년에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았으나 그 중 하나는 죽고 나머지 둘은 커서 사제가 되었다. 1730년 29세의 나이로 과부가 그녀는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한 병원 사업에 헌신하던 중, 1737년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이들과 함께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1755년 교구장의 승인을 받았다. 현재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가 설립한 수녀회는 캐나다 전역은 물론 미국과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1959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빅토리아(12.23)

아나톨리아(12.23)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 250년

 

  성녀 아나톨리아(Anatolia)는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우렐리우스(Aurelius)라는 청혼자의 끈질긴 청혼을 끝내 마다하자, 그녀의 언니인 성녀 빅토리아가 동생을 설득시키려고 애썼으나 오히려 자기 자신도 동생을 따라 자신의 약혼자인 에우게니우스(Eugenius)란 사람을 물리쳤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이들 자매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고발하여 약혼자들을 칼로 죽였다고 한다. 이 두 성녀에 대한 공경은 이탈리아 전역에 두루 퍼져있지만, 그에 따른 역사적인 증거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르불로(12.23)

신분 : 불구자

연대 : 590년경

 

   성 세르불루스(또는 세르불로)는 어릴 때부터 수족이 마비된 걸인이었다. 그는 똑바로 서거나 손을 입에까지 가져갈 수도 없었고, 혼자서 이쪽저쪽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반신불수였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를 로마(Rome)의 성 클레멘스(Clemens) 성당 문 앞에 놓아두고 애긍을 청하여 먹고살게 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성경을 한 권 구입하였다. 읽을 줄 모르는 그는 주의 깊게 성경을 응시함으로써 마음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찬미가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에게 희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찬미가나 시편을 노래로 들려준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천국에서 들리는 이상한 음악’으로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그가 임종하고 그의 유해는 성 클레멘스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연일 기적이 일어났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는 성 세르불루스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며, 불구의 몸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찬미가를 노래한 하느님 예찬자로서 높이 공경하였다.

 

토르락(12.23)

신분 : 주교

연대 : 1133-1193년

지역 :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출신인 성 토르락 토르할손(Thorlac Thorhallsson)은 15세 때에 부제 그리고 18세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해외 유학을 떠났는데 런던을 거쳐 1161년에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티크비보에르(Thykkviboer)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으며, 1178년에는 아일슬란드의 두 교구 중의 하나인 스칼홀트(Skalholt)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를 개혁하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성직매매를 추방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곧 주교직을 사임하고 이전의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하르트만(12.23) (복자)

신분 : 주교

연대 : 1164년

지역 : 브릭센

 

 오스트리아 폴링(Polling) 태생인 하르트만은 파사우(Passau)에 있던 성 니콜라우스(Nicolaus)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의 재능과 덕행이 비범하여 잘츠부르크(Salzburg)의 대주교 콘라두스(Conradus)가 교구 내 성직자들에게 공동생활과 규율에 대한 교육을 시킬 때 그를 초빙하였다. 1140년 브릭센 주교좌가 공석이었을 때 주교로 임명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는 한편, 가난한 순례자들을 위한 성 십자가 구호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국왕 콘라드 3세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24년 동안 주교로서 봉사하다가 운명하였다. 1784년 그에 대한 공경이 확인되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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