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박사 성해(聖骸) 모신 ‘주님 공현 대축일의 성지’ 쾰른 대성당
쾰른 대성당. 동방 박사 성유물 순례자를 위해 1248년에 새로 짓기 시작했으나, 1520년 이후 종교 개혁 여파로 공사가 중단됐다. 1842년 독일 민족의 자긍심으로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13세기의 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재개해 1880년에 완공했다. 2005년 쾰른 세계청년대회(WYD)의 구심점이었다. 필자 제공 |
850년 순례 역사의 쾰른 대성당
하늘을 찌를 듯한 쾰른 대성당은 독일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꼽힙니다. 1248년에 짓기 시작해 1880년에 완공된 독일 고딕 양식 성당의 걸작입니다. 첨탑 높이가 157.4m로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고, 너비 대 높이 비율에서는 가장 큰 성당이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관광지로선 큰 매력 포인트입니다. 실제 하루에 관광객 2만여 명이 다녀갑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에게 쾰른 대성당은 어떤 곳일까요?
쾰른 대성당은 13세기부터 유럽에서 손꼽히는 순례지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별을 따라 그리스도께 경의를 표하러 온 세 명의 동방 박사 또는 왕이라 불리는 성인들의 성해가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유물함은 주제단 바로 뒤에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천장,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장식들, 모자이크 바닥들에 시선이 꽂혀 여느 큰 황금 상자 중 하나라고 여기고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는데요. 목적 없이는 순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동방 박사 성유물함(1190~1125).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삼랑 형식의 바실리카 모습으로 제작했다. 길이 220cm×너비 110cm×높이 153cm, 무게 500kg, 참나무·금·도금한 은과 구리로 만든 유럽에서 가장 큰 금세공 작품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전면의 격자 패널을 열어서 성인들의 두개골을 현시한다. 필자 제공 |
1164년 밀라노의 세 동방 박사 성유물이 쾰른으로
동방 박사 성유물의 역사가 곧 쾰른 대성당의 역사입니다. 쾰른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순례지와 다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시초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라 라인강 요충지에 세운 군사기지로 출발한 로마 제국 도시입니다. 그래서 다른 로마 도시처럼 일찍부터 교회가 로마인의 주거지에 있었을 것입니다. 서기 313년 쾰른 주교가 마테르누스였다고 합니다. 대성당 세례대는 적어도 6세기 이곳에 큰 성당이 있었다고 알려 줍니다. 873년 여느 성당처럼 카롤루스 왕실의 지원으로 구(舊) 대성당이 들어섰고, 이후 측랑 등을 확장해나갔습니다.
1164년 라이날트 폰 다셀 대주교 때 쾰른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밀라노에서 세 동방 박사의 성해(聖骸, 성인의 유골)를 쾰른으로 옮겨온 겁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선제후 7인의 투표로 로마-독일왕으로 선출된 후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을 지나면서 제국의 통치를 확인했는데, 쉽게 말해 도시마다 낼 세금액을 확정했지요. 이때 이탈리아 왕국 대재상을 겸임하던 쾰른 대주교가 중재에 나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바바로사가 원정 중 행정청을 설치해 지배력을 키우려 하자 밀라노는 반기를 듭니다. 결국 황제는 무력으로 밀라노를 점령했고, 당시 자기 편에 선 대주교에게 산테우스토르지오 대성당에 있던 성해를 선사한 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쾰른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 부상했을 뿐 아니라 도시 명성과 평판도 높아졌습니다.
가대석의 ‘동방 박사 펜스’(14세기 초). 왼쪽의 두 장면은 성경 속 동방박사 이야기, 그 뒤 세 장면은 요하네스 폰 힐데스하임 수도원장의 성담(聖譚) 「축복받은 세 왕의 이야기」(1364년경)로 알려진 동방 박사의 삶과 토마스 사도의 만남, 나머지 세 장면은 성유물이 콘스탄티노플·밀라노를 거쳐 쾰른까지 오게 된 과정이 묘사됐다. 필자 제공 |
중세에 널리 퍼진 동방 박사에 대한 신심
동방 박사의 성해로 무슨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가스파르·멜키오르·발타사르 세 명의 왕은 아기 예수님을 직접 뵌 성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인식한 최초의 이교도였기에 구원의 빛이 모든 민족에게 비추고 있음을 드러낸 산증인인 동시에 민중에게 이들에 대한 공경은 간접적인 아기 예수님 경배였던 것이죠. 그래서 성해를 모신 행렬이 쾰른에 도착했을 때, 도시 전체 성직자들과 남녀노소가 모두 달려와 찬미가와 노래를 부르며 하늘에서 보낸 보물을 구 대성당에 모셨던 겁니다. 세 왕의 성해를 모실 화려한 장식을 갖춘 유럽 최대 크기의 성유물함도 만들었습니다.
이후 독일 왕들도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후 ‘최초의 그리스도 신자’ 왕들인 동방 박사를 경배하기 위해 바로 쾰른을 방문했습니다. 오토 4세는 화려한 왕관을 기증해 세 왕의 유골을 장식하기도 했죠. 이런 배경에는 교황과의 갈등에서 신성로마제국에 직접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정치적 함의도 있었습니다.
대성당 내진(內陣)의 동방 박사 소성당 스테인드글라스(1250/1260년경).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로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상단의 솔로몬왕을 찾아온 시바 여왕 사건과 동방 박사 경배처럼 구약과 신약 이미지가 좌우로 쌍을 이룬다. 필자 제공 |
성해가 쾰른 대성당 건립의 원동력
무엇보다 동방 박사의 성해는 새로운 주교좌 성당 건립에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순례자가 물밀 듯이 밀려들면서 1248년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 대주교는 구 대성당을 철거하고 더 나은 건물을 재건축하기로 합니다. 오늘날 고딕 양식 대성당의 초석이 그렇게 놓인 것이죠. 1322년 지금 모습대로 내진(內陣)이 완성된 후 지금의 위치에 성유물함을 모셨습니다. 세 현자의 유골 외에도 성 펠릭스·성 나보르·스폴레토의 성 그레고리오의 유골도 같이 안치했습니다.
특히 주님 공현 대축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전면 격자무늬의 패널을 열어 성해를 현시했는데, 순례자들은 이 시기를 큰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순례자들은 동방의 성인들에게 자신의 고민과 사랑하는 이의 아픔과 질병을 치유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성해와 접촉한 종이나 천으로 만든 일종의 ‘순례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죠. 순례증에는 동방 박사의 경배 그림과 이 증서가 병을 치유하고 위험에서 보호해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쾰른 대성당은 오랜 역사만큼 역사적 굴곡이 많습니다. 선제후가 신교로 개종해 성지가 사라질 뻔하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군을 피해 피신해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융단폭격 속에 무사한 건 기적이었죠. 하지만 짙은 어둠 속에서도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빛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2005년 쾰른 세계청년대회(WYD)였을 겁니다. ‘우리는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란 주제처럼 전 세계에서 80여만 명의 청년들이 쾰른 대성당을 방문해 경배했고, 그 후 쾰른대교구 청년들은 매년 대성당 봉헌일(9월 27일)에 맞춰 ‘동방 박사 순례’를 합니다. 2025년이 우리에게도 내면의 빛을 따라 길을 나서는 순례의 한 해가 되길 빕니다. “20+C+M+B+25!”(Christus Mansionem Benedicat, 2025년 새해에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집을 축복해주시길!)
<순례 팁>
※ 쾰른 중앙역은 유로스타(파리 3시간 15분, 브뤼셀 2시간), ICE/IC(암스테르담 2시간 45분, 프랑크푸르트 1시간 15분)가 정차한다. 주차는 CONTIPARK Tiefgarage Am Dom이 편하다.
※ 대성당 보물실(10~18시), 상트 우르술라 성당의 황금의 방(대성당에서 700m) 방문도 순례의 일종.
※ 대성당 미사 : 평일 6:30·7:15·9:00· 18:30, 주일 7:00·08:30·10:00·12:00· 18:30, 저녁 기도 : 평일 18:00, 주일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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