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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공소

(50-끝) 대전교구 서산 동문동본당 상흥리공소

by 세포네 2024. 1. 14.

1884년 이전 설립된 서산 지역 복음화의 중심

대전교구 서산 동문동본당 상홍리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때 피신한 백씨와 임씨 문중 교우들이 정착해 일군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전통 한옥과 서양 바실리카 건축 양식이 절충된 상홍리공소 전경

대전교구 서산 동문동본당 상홍리공소는 충남 서산시 음암면 상홍2길 122에 자리하고 있다. 상홍리의 옛 이름은 ‘가재’ ‘가잿골’이다. 가재는 갈재 밑에 있는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1861년 10월 전국을 서울, 상부 내포(충청도 홍주), 하부 내포(서부 충청도), 제천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충청도 동북부, 공주와 인근 지방, 경상도 서북부, 서부 경상도 8개 사목구로 나눴다. 상홍리는 서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공소 중 하나로 하부 내포 사목구에 속한다.

상홍리에 가톨릭 교우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내포 지역의 교우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와 터를 잡아 교우촌을 일궜다. 상홍리공소는 고 백남익 몬시뇰 집안과 관련이 깊다. 1882년 상홍리 교우촌에 살던 백홍진이 자기 집을 공소로 삼았다. 이후 백씨 문중 교우들이 상홍리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공소를 지키고 가톨릭 신앙을 계승했다.

일제 강점기 아동 교육과 보육의 모범 공소

상홍리공소 곧 가재공소에 관한 기록은 두세 신부가 작성한 ‘1883~1884년 교세 통계’에 처음으로 나온다. 따라서 상홍리공소는 적어도 1884년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상홍리공소 교우 수는 1885년 81명, 1886년 102명으로 서산 지역에서 가장 큰 공소였다. 상홍리공소는 1920년 4월 서산본당으로 승격됐고, 초대 주임으로 폴리(Desideratus Polly, 1884~1950) 신부가 부임했다. 서산본당은 1937년 서산 동문동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상홍리를 기반으로 지역 복음화의 중심지였다.

폴리 신부는 1920년 부임과 함께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서 사목 중에 본국으로 소환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종전 후 한국에 재입국했다. 그는 한옥과 서양 바실리카 건축 양식을 절충한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성당 건축 공사에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목수가 대거 참여했고, 상홍리 교우들은 나무를 메고 8~12㎞ 길을 걸어오는 등 성당을 짓는 데 온 힘을 합했다. 폴리 신부는 6ㆍ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에 체포돼 대전교도소에서 순교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상홍리공소 모습. 사진은 당시 농번기에 동네 아이들을 데려와 탁아소를 운영하는 장면으로, 사진 아래에는 일제 연호인 소화 13년(1938년) 6월 27일이라는 날짜가 명기돼 있다

일제 강점기 상홍리공소는 지역 아동 교육과 보육의 모범 공소로 전국에 유명했다. 상홍리공소는 농번기 어린이 공부방을 운영해 아이들에게 한글과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다. 특히 상홍리공소는 나이에 맞춰 아이반, 유년반, 소년반, 고등반, 특별반으로 나눠 단계별 「천주교 요리」(교리서)를 직접 만들어 가르쳤다. 이 교리서가 널리 알려져 1939년 서산 동문동성당에서 무료로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대축일이면 상홍리공소는 잔칫집으로 변했다. 만국기가 내걸렸고 엿장수, 과일 장수도 왔다. 교우들은 공소를 찾아온 이들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음식을 대접했다. 상홍리공소 교우들은 밥 대신 죽으로 끼니를 때워 ‘죽가재’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무엇이든 함께했다.

병인년 해미 생매장 순교자들의 첫 안식처

상홍리공소에는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묘지가 60여 년간 있었다. 1935년 본당 주임 바로(Barraux) 베드로 신부와 백낙선 회장이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했던 이주필, 이병준,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해미 조산리 진둠벙과 여숫골 숲정이, 해미 하천 변에서 생매장된 순교자들의 무덤 3곳을 찾아내 유해 10여 구를 발굴했다. 백 회장은 이들 순교자의 유해와 진토를 상홍리공소 뒷산 백씨 문중과 임씨 문중의 묘로 옮겨 안장했다. 상홍리에 있던 해미 순교자들의 유해는 1995년 해미순교성지로 이장됐다. 바로 신부는 1946년 미사 중 결핵 환자가 성체를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자 이를 주워 삼켰다가 감염돼 선종했다. 바로 신부의 묘소는 상홍리공소 인근에 있다. 또 바로 신부와 함께 해미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한 백낙선 회장은 6ㆍ25 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순교했다.

상홍리공소 교우들은 아동 신앙 교육에 힘써 나이별 단계 교리서를 직접 만들어 전국에 배포할 만큼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였다. 상홍리 공소 내부. 옛 제대와 현 제대가 공존하며 제단 가운데 십자가 대신 성모상이 장식돼 있는 것이 이채롭다.

전통 한옥과 서양 바실리카 건축 양식 절충

상홍리공소는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 건축 양식과 서양의 바실리카 건축 양식이 절묘하게 혼용된 성당 건축물이다. 근대 한국 건축사 중요성이 인정돼 2007년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돼 보존 관리되고 있다. 상홍리공소는 겉모습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한옥으로 돼 있으며,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의 전형인 삼랑식 장방형으로 돼 있다. 공소 정면에는 목재로 지은 기와지붕 종탑에 ‘천주당’ 현판이 걸려있으며, 양 측면에는 회랑을 두었다. 종탑은 1940년 낡아 철거했다가 고 백남익 몬시뇰과 고 임진창 서강대 교수가 지원해 1986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공소 내부는 삼랑식 기둥으로 공간을 구분해 놓았다. 또 내부 양편에 궁궐이나 사찰의 중층 구조를 적용해 주랑을 설치해놓았다. 제단과 회중석의 천장 높이를 달리해 공간감을 더했다. 제단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의 옛 제대와 현 제대가 함께 있다. 제단 벽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상을 중심으로 성 요셉과 예수 성심 성화가 좌우로 장식돼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리길재 기자의 ‘공소(公所)’ 시즌1을 마무리하고, 다음 호부터 리길재 기자의 새 코너 ‘다시 쓰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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