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박해 거치며 일궈낸 곰굴 신앙 공동체
횡성본당 공근공소는 기해박해를 피해 경북 예천에서 강원도 횡성 둔내로 피신온 김설연 가족이 또다시 병오박해와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일궈낸 공소이다. 곰굴 야트막한 언덕길 옆에 자리한 공근공소. |
원주교구 횡성본당 공근공소는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항재로 공근2길 23에 자리하고 있다.
공근면은 고려 때에는 ‘公謹’으로 표기됐으나,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公根’으로 쓰고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절골, 별묘, 이문안, 샛말, 봉우재를 병합해 ‘공근리’라 했다. 아울러 공근리는 공근면과 혼동을 피하고자 ‘내공근’이라 불렀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예로부터 ‘공근’이라는 한자음 이름이 아니라 ‘곰굴’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더 즐겨 사용했다. 곰굴의 곰은 ‘크다’라는 뜻이고, 굴은 골짜기를 일컫는 ‘골’의 변형으로 곰굴은 ‘큰 골’ 곧 ‘큰 골짜기’를 말한다.
김영진ㆍ김태진 신부의 증조부가 공소 뿌리
원주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펴낸 공소 순례 책자 「공소에 가볼까?」는 공근공소 설립 연도를 1915년이라 밝히고 있다. 당연히 1900년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풍수원본당과 관할 공소를 사목 방문할 때의 일기에는 공근에 관한 내용이 없다. 그리고 제2대 풍수원본당 주임 정규하 신부가 1922년 3월 31일에 작성한 ‘풍수원본당 관할 17개 공소 목록’에도 공근공소는 나타나지 않는다. 정 신부는 이 공소 목록에서 횡성군 공근면에 도새울, 하우개, 창봉리, 안창봉 등 4개 공소가 있다고만 적고 있다.
다만 정규하 신부가 1924년 5월 1일에 작성한 ‘풍수원본당 성영회 보고서’에 “공근에서 김 토마스가 심 막달레나를 돌보고 있다”며 공근을 처음으로 적고 있다. 따라서 공근공소의 정확한 설립일은 좀더 살펴봐야 할 듯하다. 아마도 교우들이 공근리에 정착한 해를 공소 설립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공근면에서는 도곡(도새울), 창봉, 안창봉, 하우개(하우고개), 초당, 오산, 가곡, 공근 등 많은 공소가 설립됐으나 현재 남아있는 공소는 공근과 도곡공소 두 곳뿐이다.
횡성본당 공근공소와 풍수원본당 오상골공소는 형제 공소이다. 거리상으로도 3㎞여 떨어진 가까운 곳에 서로 자리하고 있다. 공근과 오상골공소의 유래를 알기 위해선 먼저 원주교구 김영진ㆍ김태진 형제 신부의 가계보를 살펴야 한다. 두 신부의 조상 김설연(안토니오)은 경북 예천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설연은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제천 꽃댕이(화당리), 영월을 거쳐 횡성군 둔내면 황우우곡(현천리 황우촌)에 정착했다.
그러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김설연은 장남 김영록(실베스테르) 가족을 오상골로, 차남 김영복(요셉) 가족을 횡성 내공근(공근리)으로 피난시켰다. 김영록과 김영복 형제는 오상골과 내공근에서 숨어 지내며 신앙생활을 계속했고, 평창 산너미 이종성 가족 등 강원도 일대에 살던 교우들이 이곳으로 숨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을 이루게 됐다. 이후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김영복의 아들 김낙도(토마스)가 지금의 공근공소가 있는 양짓말로 이사와 자신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공소 예절을 했다. 이것이 공근공소 설립의 뿌리가 됐다. 김낙도 회장이 바로 김영진ㆍ김태진 신부의 증조부이다.
공근공소는 오랜 역사를 품은 공소답게 회장과 구교우, 귀농한 교우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화목한 신앙 공동체를 꾸려가는 기쁨 가득한 공소이다. 공근공소 내부 |
공소 건물 없어 공소 회장 집에서 주일 첨례
정규하 신부는 당시 풍수원본당 교우들에 대해 “몇몇을 제외하고는 수계 범절을 잘합니다. 부녀회는 선업에 힘쓰고 있어서, 자기들의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전혀 연고가 없는 어떤 맹인 노인을 보살펴 왔으며, 토요일과 주일마다 외교인들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바칩니다”(1927~1928년 연례 보고서 중에서)라고 자랑스레 평했다. 이러한 평판으로 보아 공근공소 교우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듯하다.
공근의 교우들은 오랜 세월 동안 공소 건물을 갖추지 못했다. 공소 회장 집에서 주일 첨례를 했다. 그리고 1930년 횡성본당 설립 전에는 아마도 가까운 오상골공소에서 주일 첨례를 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공근공소 교우들은 1961년 공근면 가곡리에 가곡공소가 지어지자 그곳으로 가서 주일을 지켰다. 그러다 1971년 가곡공소가 폐쇄되자 공근공소 교우들은 다시 내공근에 사는 정연철(스테파노) 회장 사랑채에서 주일 첨례를 했다. 지금의 공소는 1976년에 지어졌다. 그리고 2007년에 일부 증축했고, 2017년에 지붕과 외벽을 개축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공근공소 내부는 천장과 네 개 벽면 모두 흰색으로 도배돼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공소 벽면에 걸려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교구장 조규만 주교, 그리고 공소 교우들 사진 |
1976년 공소 신축 이후 두 차례 증·개축
공근공소는 야트막한 언덕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곰굴, 곧 큰 골짜기에 자리한 공소답게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앞에 들판이 펼쳐져 있다. 공근공소는 단층 패널 외벽에 기와지붕을 올린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로 벽면 가운데에 문을 낸 입구 지붕에는 가톨릭 공소를 알리는 십자가가 우뚝 달려 있다. 공소 내부는 천장과 네 개 벽면 모두 흰색으로 도배돼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벽면마다 창을 내 온종일 햇살이 공소 안에 머문다. 단을 쌓아 회중석과 분리한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독서대, 십자가와 예수성심상이 꾸며져 있다.
원주교구 공소 순례 책자 「공소에 가볼까?」는 공근공소를 “한때는 가톨릭 농민회 활동도 활발했으나 교우들의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역사를 품은 공소답게, 회장과 구교우들, 귀농한 교우들은 서로 마음을 모으고 기도를 모아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공소이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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