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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당건축이야기

29. 하기아 소피아 <상>

by 세포네 2023.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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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 자체가 기적인 비잔티움 건축물

하기아 소피아 내부.   출처=Piotr Redlinski
하기아 소피아 외관.   출처=Burak Kara

여호수아기는 구약 성경에서 모세 오경 바로 다음에 나오며, 역사서 가운데 첫 번째 작품입니다. 여호수아기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예호슈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들어간 영도자의 이름이며 우리말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경인 「칠십인역」도 ‘Ιησουs’(이에수스)로,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도 ‘Josue’로 표기합니다.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 일부를 전해줍니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1250년부터 1225년까지 가나안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전쟁과 그 후 정복한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 초기 거주민들은 ‘아모리인’과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모리족은 산악 지방의 사람들, 가나안족은 평야 지대의 사람들을 일컫습니다.(민수 13,29; 신명 1,7 참조)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비록 기원전 13세기에 몰락하지만, 반유목민이던 히브리인들보다 훨씬 우월한 문명과 문화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읍에 요새와 수로,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여호수아기는 그 지도자들을 ‘임금’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여호10,1-5 참조)

이스라엘의 새 영도자 여호수아는 이미 모세 오경에 등장합니다. 그는 아말렉족과 싸운 지휘관(탈출 17장)이자, 시나이 산에서는 모세의 시종(탈출 24,13; 32,17)을 들었으며, 약속된 땅을 정탐하기 위해 임명된 정탐대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민수 13,1-16)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됐고(민수 27,18), 그의 공식 후계자가 됩니다.(신명 31,23)

여호수아기는 신명기에 묘사된 마지막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신명 34장 1-9절은 모세의 죽음과 여호수아의 계승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기는 신명기 마지막 장면, 곧 이스라엘 군대가 죽은 모세를 애도하는 기간이 끝나고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기 전 모압 평야에 진을 친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가나안 정복(1─12장), 둘째, 12지파들에게 약속된 땅 분배(13─21장), 셋째, 요르단 동쪽 지파들을 돌려보낸 후 여호수아의 유언과 죽음(22─24장)입니다. 첫째 부분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예리코 지역을 정탐한 후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넙니다.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그곳에 12개의 돌로 기념비를 쌓고 가나안 땅에서 맞는 첫 번째 과월절을 지냅니다. 이후 예리코 점령을 시작으로 가나안 땅 중앙, 남부, 북부 지역을 차례로 점령해 나갑니다. 둘째 부분은 가나안 땅 분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12지파별로 땅을 나눠줍니다. 그 밖에도 도피 성읍들을 정해주고, 레위인들을 위해 각 지파가 소유한 48개 성읍을 떼어줍니다. 셋째 부분은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돌아간 이야기와 여호수아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호수아기의 핵심 내용은 1장 6-7절에 집중돼 있습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은 바로 너다.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여호 1,6-7)

여호수아기는 신명기 7장처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느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순종해야 함을 강조합니다.(여호 1,6─9. 16; 24,16-26 참조) 여호수아기는 하느님께서 몸소 가나안 땅을 정복하시고, 이스라엘에 이 땅을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을 정복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이 땅을 나눠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으시고 모세를 통해 새롭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여호 1,3.6.11; 23,5.14)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까닭은 주님께서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눈에 보이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뒤따릅니다.(여호 1,6-9; 8,32-35; 11,15)

신약 성경 저자들과 초대 교회 교부들은 여호수아기를 신약 시대의 예표로 종종 인용하였습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의 예표이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을 유다교의 율법을 이어 주님의 복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또 요르단 강을 건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세례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으로, 예리코 성의 함락을 사탄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으로, 이방인 라합의 가족이 구원받게 된 것을 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구원의 새 백성이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김정훈 신부, 「역사서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성경 묵상」 38-39쪽 참조, 바오로딸)

하기아 소피아 평면.   출처=Wikimedia Commons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변화 겪어

폭동을 진압한 지 불과 39일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도시를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 완전히 새롭고 이전의 두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의 장려(壯麗)한 세 번째 성당을 짓고자 했다. 이번에는 화재에 잘 견디도록 불연화한 석조나 벽돌로 만들게 했다. 지금처럼 중랑(中廊)의 스팬이 33m나 되는 거대한 성당에서는 목조의 트러스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적조의 아치나 볼트, 돔의 기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아시아에서 온 안테미우스(Anthemius)와 이시도루스(Isidorus)에게 계획과 공사를 맡겼다. 이들은 이교도였다. 더구나 그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기술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때까지 본 적도 없는 대담한 구조물을 실현하려면 건축가보다 기술가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정궁을 설계한 조셉 팩스톤, 에펠탑을 설계한 귀스타브 에펠과 같은 엔지니어가 근대 건축을 본격적으로 연 것과 비슷하다.

이때 건설노동자 1만여 명과 현장 감독 100명이 일했으며, 감독 한 명이 100명을 맡아 현장 지휘하게 했다. 또 이들을 반으로 나눠 각각 건물의 오른쪽과 왼쪽에서 맡아 경쟁적으로 일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저 거대한 성당은 불과 5년 11개월에 완공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양쪽의 측랑을 열주랑으로 분리한 3랑식 바실리카인데, 건물의 가로 세로는 73mx82m이다. 중랑 위 중앙에는 지름 약 31m, 높이 56m인 거대한 돔을 얹었다. 33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다. 그래서 이 돔은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시켜 지어지도록 이끄셨다고 한다. 이런 거대한 중랑 위 중앙에 돔을 얹고, 돔의 동서 방향으로는 반(半) 돔을 얹어 중랑(中廊)을 확장했다. 이로써 중심형이면서 동서의 축이 강조된 장축형이기도 한 비잔티움의 걸작이 되었다.

판테온은 원형 평면에 원형 돔이 올라가지만, 하기아 소피아는 정사각형 평면에 원형의 돔이 얹혀 있다. 사각형의 네 변은 아치가 받치게 되는데, 그러면 아치의 원호와 돔 평면의 원호 사이에는 정사각형 평면에 외접하듯이 올라가는 삼각 곡면이 생긴다. 이것이 펜덴티브(pendentive)다. ‘매달려 있다’는 말에서 나온 용어다.

전설에 의하면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37년 이 성당을 봉헌하며 약 1500년 전에 지은 첫 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면서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능가했습니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얼마나 큰지 그 장려한 돔 아래에서 전례에 봉사하는 이들은 성가대를 포함하여 5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랑은 불과 몇십 년밖에 가지 않았다.

하기아 소피아의 중앙 돔. 출처=Stanford University

아름답고 장대하며 과감한 성당 건축물

553년에 지진으로 동쪽 아치의 머리가 약해졌다. 4년 뒤 557년 지진이 있었으나 부서진 곳을 수리하는 데 실패했다. 이듬해인 558년에 동쪽 대(大) 아치와 반 돔이 무너졌고, 중앙 돔은 절반쯤이 내려앉았다. 곧바로 재건 공사를 시작했으나 남아 있던 돔의 서쪽 부분도 주저앉았다. 이 무렵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시도루스의 조카인 같은 이름의 이시드루스라는 건축가(?)가 돔 전체를 다시 만들면서, 돔의 추력을 줄이기 위해 높이를 6.4m로 높이고, 40개의 리브를 추가하며 반원에 가까운 돔을 만들었다. 돔은 단단한 돌이나 콘크리트보다 더 가볍고 가소성이 강한 벽돌 골재로 건설했다.

4년 후인 562년에 복원되었다. 돔 베이스에는 40개의 창문을 뚫었다. 모자이크로 가득 찬 돔은 이 창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전체를 6년에 지었던 것이 비하면 새로운 돔을 정말 신중하게 얹었다. 다만 돔의 추력에 견디도록 육중한 석조 버팀벽이 추가되어, 외관은 산을 마주 대하듯이 대단히 무겁다. 이 돔은 10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지진으로 다시 손상을 입었는데, 아르메니아 건축가 트르다트(Trdat, 940~1020)가 이를 고쳤다.

하기아 소피아는 아름답고 장대하며 과감한 성당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과감함 때문에 구조 설계에 무리가 있었고, 황제가 준공 시기를 서둘러서 공사를 강행한 탓에 무리를 거듭하며 지어졌다. 그러니 하기아 소피아가 오늘날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그런 하기아 소피아가 1453년 이슬람 모스크가 되었고 같은 해에 도시는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 하기아 소피아에서 전례에 참석한 마지막 회중의 탄식은 어떠했을까? 그러다가 2020년 7월 24일 금요일 85년 만에 도시 새벽을 깨우는 무슬림의 기도 소리가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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