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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초대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 선종] 위령미사

by 세포네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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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위해 사제의 삶 온전히 봉헌하신 분”

전국 주교들 모여 공동집전
헌신적인 생전 모습 기억하며 나 주교 마지막 길 배웅                

 

2월 10일 오전 인천 주교좌답동성당에서 봉헌된 나길모 주교 위령미사 중 염수정 추기경과 주교단이 강복하고 있다.

 

2월 4일 미국에서 선종한 나길모 주교의 위령미사가 10일 오전 10시30분 인천 주교좌답동성당에서 봉헌됐다.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가 주례한 이날 미사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교회의 의장이자 광주대교구장인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 전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전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전 의정부교구장 이한택 주교,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 등 전·현직 교구장 주교들이 공동집전했다.

이외에도 광주대교구 옥현진 보좌주교, 서울대교구 유경촌·정순택 보좌주교, 수원교구 교구장 대리 문희종 주교, 대구대교구 장신호 보좌주교, 서울대교구 구요비 보좌주교도 함께 집전했으며, 나길모 주교가 몸담았던 메리놀외방전교회 사제들도 자리를 같이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도 나 주교를 추모하고자 하는 발걸음은 막을 수 없었다.

답동성당은 성당 안 좌석은 물론이고 성가대석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까지 나 주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자 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성당 앞마당에도 간이로 플라스틱 의자를 마련했는데, 특히 나 주교와 추억이 있는 어르신 신자들이 많이 찾은 관계로 인천교구 사제들이 노약자들을 위해 성당 안 좌석을 양보하고 마당에 앉아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나길모 주교 위령미사에 많은 이들이 참례해 성당 안 자리가 부족해지자 앞마당에 급하게 자리를 마련했다.

 

위령미사 중에는 나길모 주교의 약력 소개 및 추모 메시지 낭독, 염수정 추기경과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마필윤 신부의 위로의 말씀, 나 주교의 인천교구민들을 위한 마지막 음성 메시지 등으로 이뤄진 추모예식이 함께 진행됐다.

염 추기경은 “선종 소식을 듣자마자 제 머릿속에는 미국으로 돌아가실 때 한국에서 쓰던 것을 다 두시고 제의와 가방 한 개를 들고 홀로 떠나시던 나 주교님의 모습이 떠올랐다”며 “한국교회를 위해 온전히 사제의 삶을 봉헌하고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으로서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신 나 주교님을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고 말했다.

위로의 말씀에 이어 “우리 신앙의 목적은 바로 그 영생입니다. 우리들 다 나중에 천당에 가서 만날 수 있도록 서로 기도합시다”라는 나 주교의 생전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오자 많은 신자들은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나 주교를 그리워했다.

 

 

[초대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 선종] 삶과 신앙

 

늘 웃으며 약자 위해 손 내밀던 친근한 목자

전쟁 상흔 가시기 전 입국
반세기 가까이 사목 활동
노동·인권문제에 큰 관심
사회적 약자 목소리 대변

 

1962년 7월 1일 인천교구장 착좌식 및 인천교구 승격식 당시의 나길모 주교.가톨릭신문 자료사진

 
6·25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7월, 28세의 젊은 사제였던 나길모 주교는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낯선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로부터 만 4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국에서 지내고, 40년간 인천교구장을 맡으면서 그는 한국을 ‘우리나라’, 인천교구를 ‘우리 교구’라고 부르며 고국인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오랜 삶을 살았다.

나 주교가 한국에 머물렀던 1954~2002년은 교회 안팎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격변의 시기였다.

고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사건은 1961년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주교수품 뒤 한국 주교단 일원으로 1962~1965년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일이다.

생전에 그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거대한 변화의 모태가 된 현장에 있었던 감격을 피력하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결정에 의해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 기쁨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나 주교는 노동·인권문제에도 큰 관심을 갖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68년 발생한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에 대해 직접 입장을 표명한 것은 교회가 약자 편에 서서 사회 참여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됐다.

심도직물 측은 직원들이 당시 인천교구 강화본당 주임 전미카엘 신부가 주도한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하며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자 이들을 불법해고하고 나 주교에게 전 신부를 전임시킬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나 주교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공단이 많은 지역 특성상 노동자에 대한 고인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인천교구는 2002년 한국교회 최초로 부활 제5주일을 ‘노동자 주일’로 제정했다.

나 주교는 1970년대 후반, 세계적인 인권운동단체인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당시 명칭 한국위원회) 이사장을 역임해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을 맡아 1996년 인천가톨릭대학교 개교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2002년 4월 인천교구장에서 사임하며 사목일선에서 물러난 나길모 주교의 은퇴 기념미사.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나 주교는 2002년 은퇴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외국인 현직 주교이기도 했다.

외부적으로는 불의에 맞서는 투사의 이미지였지만 스스로를 ‘인천 깍쟁이’라 불렀던 나 주교는 교회 내에서는 검소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했고, 가장 좋아한 음식은 인천 주교좌답동성당 앞 신포시장에서 파는 만두였다.

인천교구민들이 기억하는 나 주교의 모습은 ‘먼저 다가와 반가운 인사를 건네던 분’, ‘지하철 맨 앞 칸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던 분’, ‘늘 웃으며 약자를 위해 주시던 분’ 등 청빈과 겸손을 몸소 실천하는 진정한 목자로서 한결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목표어인 ‘UT OMNES UNUM SINT’(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의 실천을 위해 평생 애썼던 나 주교의 문장에는 국화인 무궁화, 한국교회 주보인 성모 마리아, 한국교회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 그리고 ‘제2의 고향’인 인천 항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소탈하고 사랑 많은 ‘인천 깍쟁이’ 41년간 인천교구 성장 이끌어 [평화신문]

 

▲ 나길모 주교가 2011년 답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주교수품 금경축 미사에서 문기득 인천교구 평협 회장에게 예물을 받고 있다.

▲ 나길모 주교(오른쪽)가 2002년 답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 착좌식에서 최 주교와 주한 교황대사 바티스타 모란디니 대주교(왼쪽)와 기도하고 있다.

▲ 나길모 주교가 2002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송별미사를 봉헌하고 신자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 1994년 인천교구 작전동본당 새 성전 축복식에서 성수를 뿌리고 있는 나길모 주교.


  6ㆍ25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28세 젊은 미국인 선교 사제가 한국 땅을 밟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16일 항해 끝에 닿은 부산항. 그가 처음 마주한 광경은 부두를 채운 환영 인파였다. 환대 속에서 그는 다짐했으리라.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교회를 재건하겠노라고. 그런데 이때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이 초대 인천교구장이자 한국 교회 사상 최장 재임 교구장이 될 줄을. 4일 선종한 메리놀 외방선교회 출신 윌리엄 존 맥노튼(William J. McNaughton), 한국명 나길모(굴리엘모) 주교 이야기다.

나 주교는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주도 보스턴 근교 작은 도시다.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 프랑스계 캐나다인 등 가톨릭 문화권 출신이 특히 많이 정착한 곳이다. 자연스레 로렌스는 가톨릭 교세가 강한 도시가 됐다. 유일한 사립고교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가 세운 센트럴 가톨릭고등학교였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나 주교도 1944년 이곳을 졸업했다.

전쟁 직후 한국 땅 밟은 젊은 사제

나 주교는 같은 해 메리놀 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뉴욕 메리놀 대신학교에서 학부와 신학원을 마치고 종교교육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3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였다. 한국 선교를 결심한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1년간 한국어를 배웠다. 메리놀회 선배들이 늘 이야기했던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일까. 청년 나 신부는 기대를 안고 부산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첫 소임지는 충청북도 감목대리구(현 청주교구)였다. 당시 메리놀회가 서울대목구로부터 사목을 위임받은 곳이다. 초대 청주교구장이자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이던 제임스 파디(야고보) 주교는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일제에 쫓겨나기 전까지 의주에서 7년간 사목했던 인물이다. 어렵사리 돌아온 만큼 그는 교회를 재건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뜨거운 선교 열기 속에서 나 신부는 장호원(현 감곡)본당 보좌로 첫 사목을 시작했다. 이어 북문로(현 서운동)본당 보좌와 주임, 내덕동본당 주임을 거쳤다. 또 교구 참사와 부감목을 지냈다.

1961년 6월 인천대목구(현 인천교구)가 설정됐다. 청주 부감목이던 나 신부가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됐다. 그해 8월 주교품을 받았다. 34세 되던 해 일이다. 주교 서품식은 고향 로렌스의 성 마리아성당에서 거행됐다. 보스턴대교구장 리처드 쿠싱 추기경이 주례했다. 사목표어는 “UT OMNES UNMM SINT”(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요한 17,21) 문장은 국화 무궁화, 한국 주보성인 성모 마리아, 한국 교회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그리고 인천 항구를 담았다. 1년 뒤, 한국 교회 교계제도 설정으로 인천대목구가 인천교구로 승격하면서 나 주교는 초대 인천교구장에 착좌했다. 그리고 41년 동안 봉직했다.

전철 타는 주교님

인천교구장 재임 시절 나 주교는 ‘전철 타는 주교님’이라고 불렸다.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붙여진 별명이다. 또 아침에 먹다 남은 수프를 저녁에 데워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오랜 세월 사목 동반자였던 고 김수환 추기경은 나 주교를 ‘매번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오는 정말 겸손한 분’이라고 평했다.

아낄 줄 아는 만큼 베풀 줄도 알았다. 나 주교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전국 최초로 신자들의 밀린 교무금을 탕감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성당을 못 나오는 신자에게 은총과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나 주교는 근면 성실한 분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나 주교는 단 한 번도 주교회의에 결석한 적이 없었다. 맡은 일에 항상 충실하셨던 분”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나 주교는 주교회의 총무를 시작으로 전례위원장, 일치위원장, 교리교육위원장 등 40년간 주교회의 주요 직책을 두루 지냈다. 그 성실성은 로마에서도 빛났다. 나 주교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전 회기에 개근했다. 몸이 몹시 아팠던 단 이틀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 주교가 근검절약 정신으로 교구를 운영해왔지만, 살림살이는 늘 팍팍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데다 교구 교세도 크지 않았다. 1961년 교구 신설 당시 본당은 9개, 신자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했다. 나 주교는 공업지역 인천이 가진 인구 잠재력을 믿었다. 땅을 사고 성당을 짓는 데 공을 들였다. 선견지명이었다. 나 주교 재임 마지막 해, 인천교구 본당은 85개, 신자는 37만 2000여 명에 달했다.


은퇴 후 부모님과 약속 지키려 미국으로

나 주교는 2002년 4월 인천교구장 직을 사임했다. 부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신임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나 주교는 은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남아 달라는 신자들 애원에 이렇게 답했다. “5남매 장남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어요. 은퇴 후에는 고향에 돌아오라는 어머니 유언을 꼭 따르고 싶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나 주교는 고향 근처 메수엔이라는 소도시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도 인천교구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한인 사목에 힘썼다. 사제 수품 60주년도 보스턴 한인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기렸다.

나 주교는 인천교구를 잊지 못했고, 교구도 그를 잊지 못했다. 교구 초청을 받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사제 수품 50주년인 2003년. 그리고 주교 수품과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은 2011년이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나 주교는 말했다. “인천교구 가족들이 가장 그리웠노라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도 그는 벅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TV로 지켜봤다. 마음만은 스크린 너머 신자들과 함께 있었으리라.

나 주교가 이 땅에 심은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결실을 보았다. 인천교구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신자 수(51만 7000여 명)가 많은 교구가 됐다. 본당은 127개, 사제 수는 340여 명에 이른다. 복음화율(11.7%)도 전국 세 번째다.

스스로를 ‘인천 깍쟁이’라고 부른 나길모 주교. 그는 참된 선교사였다.

                            

 

■ 고(故) 나길모(羅吉模) 굴리엘모 주교 약력
(Most Rev. William J. McNaughton, M.M.)

소속: 메리놀외방전교회
1926.12.07. 출생

사제수품: 1953.06.13. / 주교수품: 1961.08.24.

1954.07.22. 내한
1954.08.13.~1955.09.01. 청주교구 장호원본당 보좌신부
1955.09.02.~1955.09.27. 청주교구 북문로본당 보좌신부
1955.09.28.~1957.08.14. 청주교구 북문로본당 주임신부
1957.08.15.~1960.07.15. 청주교구 내덕동본당 주임신부
1961.06.06. 투부르보 미누스 명의주교와 인천대목구장 임명
1962.03.10. 인천교구장 전보(인천교구 승격)
1962.10.~1965.12. 제2차 바티칸공의회 참석
1962.11.14.~2002.04.25. 재단법인 인천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이사장
1964.02.05.~2002.04.25. 학교법인 인천가톨릭교육재단 이사장
1965.02.~1981.05. 주교회의 총무
1965.02.~1970.10.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장
1973.10.~1978.04. 주교회의 일치위원회 위원장
1978.04.~1984.11.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위원장
1994.09.12.~2002.04.25.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
1996.12.30.~2002.04.25. 재단법인 인천가톨릭청소년회 이사장
2002.04.25. 인천교구장 사임, 은퇴. 이후 미국 보스턴 대교구에서 교포(한국인들) 신자들을 위한 사목 활동
2020.02.04.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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