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를 망각한 소작인은 포도처럼 으깨진다
▲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 백성울 잘 보살피라는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사진은 포도밭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일꾼들 【CNS 자료사진】 |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대응하시며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로 그들의 속셈을 들춰내십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20,1-8)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실 때였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원로들과 함께 다가와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당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는 것입니다.(20,1-2) 질문한 사람들의 지위로 본다면 예수님께 대한 질문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라면 자기들 눈에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 보이면 이런 질문을 할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루카복음의 맥락에서 보면 이들의 질문에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의도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후 날마다 가르치셨을 때 그들,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9,47-48)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제기한 질문에 즉답을 하시기보다는 거꾸로 질문하십니다. 그들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덫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반문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참으로 묘했습니다.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는 책망을 받을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대답한다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백성들에게 자칫 돌을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을 침묵하게 만드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20,9-19)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이들을 요한의 세례와 관련한 절묘한 질문으로 머쓱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궈 소작인들에 내주고 “오랫동안 멀리 떠나”(20,9) 있었습니다. 수확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하나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매질해서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는데, 그들은 그 종도 “매질하고 모욕하고 나서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을 보내자 소작인들은 그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내 아들을 보내야겠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상속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그러면 포도밭 주인이 돌아와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십니다.(20,9-16)
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잘 보살피고 하느님과 약속한 것을 잘 이행하라고 당신의 사자들, 곧 종들을 보냈지만 지도자들은 오히려 박해하고 내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씩이나 종을 보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만큼 인내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사랑하는 내 아들”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비유의 이런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씀드리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그 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와 이 시편 말씀을 결부시킴으로써 소작인들이 죽여버린 그 아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20,19ㄱ)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율법학자들과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이 바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장 손을 대려고 하지만 하지 못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백성이 두려웠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20,19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일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었습니다. 성전 마당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너희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혹독하게 지탄하십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 축에 속하는 바리사이들과 예수님의 갈등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그리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도중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5,27-32; 6,1-5.11; 11,37-54 참조) 하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그 갈등이 더욱 깊어지면서 이제는 예수님을 없애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19,48)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일화에 이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님을 없애려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의 음모를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반감은 “당장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20,19) 할 정도로 깊어집니다.
다른 한 편으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또한 공동체나 사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자기가 맡은 공동체나 사회를 위해 성실하게 봉사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책무를 소홀히 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자신의 권한이나 지위를 남용한다면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엄중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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