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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월 1일 성인

by 세포네 2006.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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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1.1)

신분 : 주교

연대 : 374년

지역 : 나지안주스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그의 생애 중 처음 50여년간을 이교도로서 보냈고, 성년의 대부분은 정부의 관리로서 지냈다. 그는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325년에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와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2월 25일) 그리고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의 아버지인 그는 328년에 나지안주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이단적인 그리스도교의 분파에 빠져들었으나 361년 그의 아들 성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정통 신앙으로 되돌아왔다.

 

마뇨(1.1)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의 활동연대와 그 외의 모든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로마 순교록에 순교자로서 언급되어 있다.

 

미드윈(1.1)

엘반(1.1)

신분 : 평신도

연대 : 2세기

 

   성 엘반(Elvan)과 성 미드윈은 영국의 왕 성 루키우스(Lucius, 12월 3일)의 명에 의해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청원서를 가지고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5월 26일)에게 파견된 이들이다.

 

바실리오(1.1)

신분 : 주교

연대 : 521년

지역 : 엑스

 

   잘 알려진 전설에 의하면 프랑스 아를(Arles)의 사제로 후에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엑스의 주교가 된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성덕과 놀라운 업적 그리고 기적을 행한 사람으로서 칭송을 받고 있다.

 

베드로(1.1)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773-837년

지역 : 아트로아

 

   소아시아의 에페수스(Ephesus) 출신인 성 베드로(Petrus)는 18세의 나이로 수도자가 되어 성 바오로(Paulus)라는 수도자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이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7년 후에 사제로 서품되고, 스승과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려다가 올림푸스 산으로 갔는데, 스승은 이곳에서 성 자카리아(Zacharias) 수도원을 세웠다.

   805년에 스승이 운명하자 성 베드로가 그를 승계하여 원장이 되었으나 10년 동안 수도원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 이유는 레오 황제의 성상파괴 박해가 재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 베드로에게 현상금까지 붙었기에 그는 에페수스와 크레타(Creta) 등지로 숨어 다니다가 헬레스폰트(Hellespont) 해협 근교의 칼로나로스(Kalonaros)에 정착하였다. 그는 마술을 하며 또 악마를 이용한다는 소문에 시달렸으나,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가 그 소문이 거짓임을 판명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 아트로아로 돌아가서 성 자카리아(Zacharias) 수도원을 재건하였으나, 또다시 박해가 치열해지자 성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수도원에 은신하다가 다시 원래 자기의 은둔소로 돌아가서 운명하였다.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1.1)

 

신분 : 주교

연대 : 1745-1824년

지역 : 마체라타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ius-Maria Strambi)는 이탈리아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에서 어느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짓궂게 장난치는 아이였지만, 맨발이거나 혹은 남루한 옷을 입은 부랑아를 보면 자기의 외투와 신발조차 벗어주는 갸륵한 소년이었다. 그는 교구사제가 될 마음으로 공부했으나 서품 직전에 십자가의 성 바오로(Paulus, 10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예수 고난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극심하던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마침내 수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수도원 내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1781년에 관구장이 되었으며, 또 1801년에는 자신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체라타와 톨렌티노(Tolentino)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불굴의 노력은 이탈리아 전역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놀라운 쇄신을 불러일으키는 주교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08년 그는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대하여 추방되었으나, 1813년 나폴레옹이 실각함으로써 교구로 돌아왔다. 교황 비오 7세(Pius VII) 서거 때에 그도 역시 사임하였으나, 그의 열렬한 친구이던 레오 12세(Leo XII)의 등극과 더불어 그는 교황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이 모든 직책에서도 그는 수도생활의 정신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복녀 안나 마리아 타이기(Anna Maria Taigi, 6월 9일)가 예언한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고, 1824년 1월 1일 79살의 생일날에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빌리암(1.1)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962-1031년

지역 : 디종

 

   성 베니뇨(Benignus)의 빌리암(William of Saint Benignus)이라고도 부르는 성 빌리암은 볼피아노(Volpiano)의 백작 로베르투스의 아들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노체라(Nocera)와 가까운 오르타(Orta) 호수에 있는 산 주글리오 섬의 가족성에서 태어났고, 17세 때에 로카디오(Locadio)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987년에는 클뤼니(Cluny) 수도원에서 성 마욜루스(Majolus, 5월 11일)를 만났다.

   그는 론(Rhone) 지방의 성 세르닌(Sernin) 수도원을 재정비하였으며, 990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 디종의 성 베니뇨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학문과 영성운동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으며, 부르고뉴(Bourgogne), 로렌(Lorraine), 노르망디(Normandie) 그리고 북이탈리아의 40개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알마치오(1.1)

신분 : 순교자

연대 : 400년경

 

   동방 교회의 은수자인 성 알마키우스(또는 알마치오)는 투기장에서 검객들의 시합을 중단시키려고 하다가 로마(Rome)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테오도루스(Theodorus)에 의하면 그의 죽음이 호노리우스 황제로 하여금 검객들의 시합을 중지시키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텔레마쿠스(Telemachus)로도 알려져 있다.

 

에우젠도(1.1)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510년경

지역 : 콘다트

 

   성 로마누스(Romanus, 2월 28일)와 그의 제자인 성 루피키누스(Lupicinus, 3월 21일)가 서거한 뒤 이 두 성인이 스위스 주네바(Geneva) 인근에 세운 콘다트 수도원은 일곱 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성 에우겐두스(또는 에우젠도)가 원장인 미나우시오를 도와서 지도하고 있었다. 성 에우겐두스의 생활은 다른 수도자들의 입에서도 너무 엄격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분노하는 행동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무던히 애썼다. 그래서 그의 성격은 항상 온화하였지만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그는 실로 학문의 대가였다. 그가 콘다트의 원장으로 재직할 때 불타버린 이 수도원을 돌로 재건하였고, 또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 및 성 안드레아(Andreas)에게 봉헌된 성당도 재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그의 불타는 열성은 임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61세가 되어 운명하자 콘다트 대수도원은 에우겐두스 성인의 이름을 따서 생오이엥(Saint-Oyend)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오이엔도(Oyend)로도 불리기 때문이다.

 

에우프로시나(1.1)

신분 : 동정녀

연대 : 5세기경

 

   성녀 에우프로시나(Euphrosyna)는 부자이던 파프누티우스(Paphnutius)란 사람의 딸이었다. 부친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얻은 딸이므로 그녀를 일찍 결혼시키기 위하여 어느 부자 집 아들과 미리 약혼을 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봉헌생활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항상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다. 한번은 그녀의 부친이 출타했을 때 그녀가 태어나도록 늘 기도를 해왔던 어느 늙은 수도자가 찾아와서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혔다.

   그러나 그녀는 부친의 불같은 성화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남장을 하고 또 남자 수도복을 입고서 그녀의 부친이 자주 찾아가는 수도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스마라그두스(Smaragdus)라 불렸으며,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는 그 시대에 상당히 유명했다. 그녀의 부친도 딸에게서 영적 지도를 자주 받았으나 스마라그두스 수사가 자기 딸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이윽고 그녀가 운명할 즈음에 부친에게 자기의 신원을 밝혔다. 이에 감동한 그녀의 부친은 곧 수도자가 되어서 딸이 살던 수도원 방에서 10년을 살다가 하느님 품에 안겼다.

 

오딜로(1.1)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962-1049년

지역 : 클뤼니

 

   클뤼니의 수도자인 성 오딜로는 994년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원래부터 매우 엄격한 규율을 자발적으로 잘 지켜 왔는데, 1006년에 기근이 들자 성당의 주요 재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사용할 정도로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재임기간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회원 수효가 급격히 불어나서, 다른 곳의 수도원들은 이곳에서 배출되는 수도자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할 정도였다.

   특히 그의 뛰어난 업적은 소위 ‘하느님의 휴전’이라 불리는 전면 휴전 제도를 프랑스가 도입하게 하였고, 또 성당에 피신처를 구하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강생과 성모 신심이 뛰어났으며, 세상을 떠난 모든 교우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제정하였다.

 

요셉 마리아 톰마시(1.1)

 

신분 : 추기경

연대 : 1649-1713년

 

   시칠리아(Sicilia)의 알리카타(Alicata) 태생인 성 요셉 마리아 톰마시(Josephus Maria Tommasi)의 부친은 팔레르모(Palermo)의 공작이었고 람페두사(Lampedusa) 섬의 왕자 칭호를 가진 분이었다. 요셉의 네 누이들은 부친이 팔마(Palma)에 세운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소년 요셉은 이미 훌륭한 그리스어 학자였다. 또한 교회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테아틴(Theatine)회 총장은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

   수도생활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3회원이 되었고, 그의 부친도 비슷한 결정을 함에 따라 그의 앞길을 막던 장애물이 걷혔다. 그는 1664년에 팔레르모에서 테아틴회의 수련자로 출발하여 서원한 뒤 메시나(Messina)로 가서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로마(Rome)로 가서 페라라(Ferrara)와 모데나(Modena) 대학을 다녔고, 1673년에는 나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거의 기도와 학문연구에 바친 은수자의 생활이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 성서 그리고 특히 성무일도를 연구하였다. 그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히브리어 교사이던 랍비 모세 다 케이브가 유대교에서 개종까지 하였다. 그의 첫 저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거울"이며, 1680년에는 고대의 전례를 서술한 "코디체스 사크라멘토룸"(Codices Sacramentorum)을 냈고, "시편"은 주세페 카로(J. M. Carus)라는 필명으로 냈다. 1697년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게 순종하는 뜻으로 바티칸으로 들어갔고, 1704년에는 바티칸의 신학자로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순한 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다. 음식도 늘 초라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미사를 드리는 그를 보고 그에게 특은이 내렸음을 누구나 인정하였고,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가 12월에 중병에 들자 그는 "교황은 회복되고 내가 곧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는 1713년 1월 1일에 선종하였다. 그는 1803년 시복되었으며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우골리노(1.1) (복자)

신분 : 수사

연대 : 1260년

지역 : 괄도

 

  우골리누스(또는 우골리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들어갔다는 기록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짧은 수도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덕의 향기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1919년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유스티노(1.1)

신분 : 주교

연대 : 540년

지역 : 키에티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아주 옛날부터 이탈리아 키에티의 성인으로 공경받아 왔다. 어떤 저자들은 그를 키에티의 주교로서 묘사하고 있다.

 

츠디슬라바(1.1)

신분 : 부인, 3회원

연대 : 1252년

 

   보헤미아(Bohemia)의 리토메리치(Litomerici) 교구 출신인 성녀 츠디슬라바(Zdislava de Lemberk)는 불과 일곱 살의 나이에 인근의 숲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돌아오곤 하였으나 그녀의 고집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부모는 일찍이 그녀를 어느 귀족과 결혼시켰고, 그녀는 네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은 어린 아내를 항상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녀는 항상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대모로서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타타르족이 침입하여 그들의 머무는 가벨 성이 함락되었을 때 남편이 어느 걸인을 침대에 재운 적이 있었는데, 이 걸인이 곧 그리스도의 발현이었다. 이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남편은 그 길로 아내를 도미니코회의 3회원이 되게 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매일같이 성체를 모셨다. 그녀는 도미니코회의 초대 3회원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907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공경이 허용된 후 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콘나타(1.1)

신분 : 수녀원장

연대 : 590년

지역 : 킬데어

 

  성녀 콘나타(Connata)는 아일랜드 킬데어에 있는 성녀 브리지다(Brigida)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그녀는 콤나탄(Comnatan)으로도 불린다.

 

콘코르디오(1.1)

 

신분 : 신부, 순교자

연대 : 178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차부제이던 성 콘코르디우스(또는 콘코르디오)는 사막에서부터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총독 토르과투스 앞으로 끌려왔다. 총독은 첫 심문에서 곤봉으로 그를 마구 때렸고 두 번째에는 고문대에 올려놓았는데, 그는 높은 곳에 매달린 채로 “주 예수여, 찬미 받으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3일 후 2명의 군인이 와서 그를 지하 감방에 가두었다. 그가 희생을 바치라는 신상 앞에 침을 뱉자 군인이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클라로(1.1)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660년경

 

   성인이 젊은 시절에 얻은 클라루스(또는 클라로)라는 이름은 ‘빛남, 광명’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의 인간적인 지식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놀라운 지식 때문에 얻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에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는 옛 지방인 도피네(Dauphine)의 비엔(Vienne)에 있는 성 마르첼루스(Marcellus)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훌륭한 덕을 닦았다. 그는 비엔의 대주교인 카데올두스에 의하면 성 페레올(Ferreol) 수도원의 수도자로 출발하여 성 블란디나(Blandina)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러 부인들을 수도생활로 인도하였다. 클라루스에 대한 공경은 1903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는 재단사와 재봉사의 수호성인이다.

 

판체아(1.1)

신분 : 수녀원장

연대 : 530년경

지역 : 로소리

 

   성녀 판케아(또는 판체아)는 성 엔다(Enda, 3월 21일)의 누이로서 아일랜드 클로거(Clogher)에서 태어나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였다. 그녀는 군인이었던 성 엔다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설득하여 피 흘리는 전투에서 손을 씻고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라고 애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성 엔다로 하여금 하느님을 섬기게 만든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녀는 퍼매너(Fermanagh)의 로소리에 수녀원을 세웠다.

 

펠릭스(1.1)

신분 : 주교

연대 : 580년경

지역 : 부르주

 

   성 펠릭스는 파리(Paris)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5월 28일)가 그의 주교직을 승인하고 축성한 인물이므로 존재 여부는 확실하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다. 그는 573년 파리 회의에 참석하였고 성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가 그에게 헌시를 바친 것이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무덤은 카스트로(Castro)의 성 아우스트레시실루스(Austregisilus) 성당에 있다.

 

풀젠시오(1.1)

 

신분 : 주교, 증거자

연대 : 467-533년

지역 : 루스페

 

   카르타고(Carthag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파비우스 클라우디우스 고르디아누스 풀겐티우스(Fabius Claudius Gordianus Fulgentius, 또는 풀젠시오)는 어머니가 과부가 되면서부터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였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사임하면서부터 정통파 주교인 파우스투스(Faustus)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507년 그는 루스페(오늘날 튀니지의 쿠디아트 로스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리우스파(Arianism)인 반달족(Vandals)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파 주교들이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그런대로 교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Cagliari)에 유배된 동안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반달족의 왕인 트라시문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왕은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리우스파 성직자와의 토론회를 주선하였으나 풀겐티우스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518년에 사르데냐 섬으로 다시 추방해버렸다.

   그 후 왕의 후계자인 힐데릭이 귀향을 허가하여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대부분은 유배생활로 보냈다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은 겁을 내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배격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목자였다. 그 후 그는 시르시니아(Circinia)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은거하였다가 루스페로 돌아온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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